유리같은 세상은 순진한 꿈에 불과한 것일까
“와 이렇게 큰 거미는 처음 보는데? 이리로 와봐”
남편이 가리키는 곳은 뒷 베란다 창문이었다. 거대한 거미 한 마리가 여덟 개의 다리를 활짝 펼친 채 창문에 달라붙어 있었다. 섬세하게 분절된 마디마디는 완벽한 균형미를 자랑하고 가냘픈 다리는 솜씨 좋은 장인의 세공품처럼 정교하고 우아했다.
여름이 무르익어 가던 어린 시절의 어느 날에는 내 방 창문 앞에 매미가 찾아왔다. 짙은 보호색으로 무장한 매미는 레이스 같은 날개를 바르르 떨며 울었다. 여름방학 숙제를 하기 위해 친구들과 올랐던 동네 야산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놀라서 흠칫 물러났지만 이내 호기심이 생겨 유리에 이마를 대고 매미를 관찰했다. 곤충은 좀처럼 앞을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유리에 붙어 있는 곤충은 그동안 꽁꽁 숨겨왔던 배를 온전히 드러낸다. 덕분에 오랫동안 매미를 바라볼 수 있었다. 유리가 매미와 나 사이의 차단막이 되어 서로를 보호해 주었기 때문이다. 징그럽고 무서워 가까이 가지 못했던 매미를 마음 놓고 관찰할 수 있었고 매미 역시 '인간'이라는 잔인한 종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리 덕분에 목청껏 울 수 있었다. 사라진 경계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고 곤충의 내밀한 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유리는 아이러니한 물건이다. 가려주고 보여주는 이중의 역할을 한다. 안과 밖을 경계 짓지만 투명해서 속이 다 보인다. 훤하게 들여다볼 수 있기에 경계가 허물어진다. 유리잔, 술병, 화장품 용기가 속이 다 보이지만 외부와는 완벽하게 차단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건 유리라는 독특한 용기에 담긴 덕분이다.
어른이 되면 유치한 선 긋기는 하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경계는 더욱 정교하고 조밀해졌다. 남과 나를 구별 짓고 서울과 지방을 구분 지었다. 우수 고객 전용 주차장, 전용 라운지 등으로 부자와 서민을 가려내기도 한다. 유럽에서 인종차별을 당하고 돌아와서 동남아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하다못해 입맛 취향까지 대결구도를 양상을 띤다. 탕수육 소스를 두고 부먹(부어 먹기), 찍먹(찍어 먹기) 논란이 일고 민초(민트와 초콜릿), 반민초에 이르기까지 구별 짓기에 여념이 없다. 웃어넘기면 그만이지만 사소한 취향 하나에도 다름을 강조하는 것만 같아 씁쓸하다.
선은 나와 남을 구분하고 다르다는 것을 강조는 메타포다. 단순히 다르다는 차원을 넘어 남보다 우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남을 낮춤으로써 자신을 올리고 긍정적 자아상을 지키내기 위한 안간힘이다. 범주화, 비교와 평가를 통해 차별을 위한 발판을 착실히 다져가지만 누구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상수가 될 수는 없다. 오늘은 강남에 살지만 내일은 지방 소도시에서 살지 모른다. 잘 나가는 직장인에서 실업자 신세로 전락할 수도 있다. 포도주를 좋아하다가 어느 날부터는 막걸리가 당길 수도 있다.
구별 짓기는 결국 배제의 다름 아니다. 곡식을 걸러내듯 온갖 체로 하나하나 세심하게 걸러내고 나면 남는 건 과연 무엇일까? 투명하게 서로를 내 보일 수 있지만 선을 넘지 않는, 유리 같은 세상은 순진한 꿈에 불과한 걸까?
거미는 여전히 꼼짝 않고 창문에 매달려 있다. 사라진 경계 덕분에 거미에 대한 오해(징그럽고 위험한 곤충)가 사라졌다. 그는 나에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는 무해한 생명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