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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Oct 23. 2022

작가가 되고 말았다

가난한 내 언어만큼은 지키고 싶다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어느 봄날, 중학교 3학년 교실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글을 읽어주고 있다. 때는 5교시, 점심을 배부르게 먹은 아이들에게 선생님의 목소리는 어릴 때 엄마가 들려주던 자장가보다 몇 배의 효력이 있었다. 나른한 오후 햇살까지 비추고 있어 ‘잠자기 딱 좋은 날씨’였다. 하나 둘, 아이들의 눈이 감기기 시작했고 사위는 점차 조용해졌다. 선생님의 목소리만이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고개를 푹 숙인 채 조용히 선생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의 볼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고 손은 가슴을 꼭 누르고 있었다. 백일장에 제출한 작품인데 반 친구들과 공유하고 싶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 글의 주인공은 나였다. 그날의 사건은  학창 시절의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았다. 물론 곧이어 닥친 입시지옥 속을 헤매고 다니느라 기억은 금세 휘발되어 사라지고 말았지만. 


좌충우돌하던 직장생활이 차츰 안정을 찾아가자 매너리즘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왔다. 똑같은 하루의 반복, 매일 보는 얼굴들, 지루한 출퇴근을 되풀이하는 속에서 에너지가 고갈되었고 몸과 마음은 소진되었다. 때마침 ‘동료 교사의 사퇴’라는 사건(?)까지 맞물리면서 이런저런 고민이 뾰루지처럼 여기저기서 솟아났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서 미련 없이 교직을 떠난 그녀의 용기가 부러웠다., 하지만 직장을 포기하고 달려갈 만한  ‘하고 싶은 일’이 내게는 없다...고 생각했다. 중학교 때의 어느 날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전까지는. 


그날, 그 시간, 그 장소에 정확하게 조준된 렌즈의 초점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또렷해졌다. 글을 쓰고 싶었다. 잠자고 있던 욕망을 확인한 후 시간이 날 때마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일기를 쓰거나 특별한 날 아이들에게 편지글 형식으로 쓰기도 했다. 잘 쓴 칼럼이나 에세이를 보고 나면 같은 제목으로 다시 써 보기도 했다. 차곡차곡 글이 쌓여갔다. 어느 날 혼자만 쓰고 읽는 방식에서 벗어나 대중들과 소통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공적인 영역으로 진입해서 정식으로 ‘작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아는 사람 중에 작가는 한 명도 없었다. 내가 작가가 될 수 있을까? 누가 내 글을 읽어줄까? 출판사에 투고는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은 독립출판도 활발히 하고 있고 마음만 먹으면 여러 경로로 책을 내는 게 가능해졌지만 첫 책을 내던 당시만 해도 정보가 거의 없었다. 밤을 새워 가며 글을 쓰고 수도 없이 퇴고를 되풀이한 후 출판사에 투고 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안 한 건 아니지만 여러 출판사에서 동시에 연락이 올 줄은 몰랐다. 그렇게 나는  작가가 되고 말았다. 


작가가 되면 엄청난 이벤트가 빵빵 터질 줄 알았다. 날개 돋친 듯 책이 팔리고 쌓인 인세 덕분에 통장잔고가 빵빵해지고 근사한 작업실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글을 쓰는 내 모습을 떠올렸다. 무릎 나온 츄리닝 바지를 입고 쓰레기를 버리러 가다가 독자와 마주쳐서 당황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바보처럼 웃었다. 하지만 현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이른 아침에 출근을 했고 때때로 야근도 했다. 작업실 대신에 카페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글을 썼고 독자와 마주치는 일을 걱정해야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책 출간 프로젝트는 성형에 실패한 여자처럼 외견상 비포 에프터의 차이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강연 요청이 왔고, 원고 청탁이 들어왔으며 가끔 인터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방송 출연도 한 번 했다(무려 생방송이었다. 하지만 가문의 영광으로 자부하기엔 시대가 너무 많이 변했다) 하지만 내가 상상했던 드라마틱한 변화는 아니었다.  


그러나 삶의 속살은 많이 달라졌다. 글을 쓰기 전과 그 이후의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나만의 언어를 가진, 존중받는 개인이 되었다. 작가라는 걸 알고 나면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진다. “작가님이세요?” “진짜요?” 직장 내 위치도 조금 달라졌다. 승진을 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나를 대하는 상사의 태도나 말투가 조심스러워졌고 누구도 나를 함부로 하지 않았다. 무심코 한 말이나 태도가 나의 언어로 규정될 수 있고, 내 글의 주인공으로 언제든 원치 않은 데뷔를 할지 모른다는 조심스러운 마음 때문은 아니었을까. 글을 쓰는 일은 과거의 나와 마주하고 막연한 나를 또렷하게 인식하는 작업이다. 희미한 스케치에 색을 입히고 명암을 넣어 ‘나’라는 한 장의 선명한 그림을 완성하는 일이다. 나를 알고 나면 '타인'이라는 더 넓은 세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책을 내고 작가가 되지 않더라도 글 쓰는 모든 사람들이 계속 썼으면 좋겠다. 출판사를 통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SNS에 글을 쓰고 기록하는 사람들이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나는 가진 게 별로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가난한 내 언어만큼은 지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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