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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Oct 11. 2022

본전 뽑는 여행

삶의 시계는 조금 천천히 돌아도 괜찮다

해외여행을 처음 떠났을 때 나는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기도 했다. 일행은 없었지만 패키지여행이었기에 몇몇의 팀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나처럼 혼자 온 직장인 여성, 우아한 중년의 아주머니, 아들을 데리고 온 부부,  나이 지긋한 아저씨 가족 등. 구성도, 백그라운드도 각기 다른 사람들이 가이드의 인솔 하에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혼자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여행자들을 관찰하게 되었다. 아들 하나를 데리고 온 부부는 툭하면 아들을 나무라고 야단쳤다. 한창 말썽을 피울 중학생이라 그럴 법도 했지만 여행지에서까지 간섭하고 나무라는 부모와 함께라면 집에 있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중년의 아저씨는 가족 기념일을 맞아 온 가족을 대동하고 왔는데 틈 날 때마다 ‘‘라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긴 훈수를 늘어놓았다. 초등학생 남자아이 둘을 데리고 온 젊은 부부도 있었다. 나를 포함한 일행의 대부분이 해외여행이 처음이었는데 이 가족은 한두 번이 아닌 듯 아이 엄마는 무심하다 못해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여행지에서 지을만한 표정이란 게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호기심 어린 눈빛이거나 활기찬 표정을 짓기 마련이다. 하지만 여자의 얼굴에는 권태와 짜증이 잔뜩 묻어 있었다. 생애 첫 해외여행이라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나는 도대체 얼마나 여행을 다니면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있을까 의아해했다.(다른 사정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때의 관심사는 오로지 여행에만 집중되어 있던 때라 다른 이유를 상상할 여유가 없었다.) 


패키지여행이 으레 그렇듯 유럽 9개국을 11박에 돌아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었다. 하지만 ‘11일 동안 9개국이나 볼  수 있다고? 가성비 갑이네. 완전 본전 뽑겠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고른 상품이었다. 9개국을 11일 동안 돌아야 했기에 1일 1국은 기본이고 1일 2국을 찍은 날도 있었다.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는 긴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나라가 바뀌었다.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다시 스위스로. 패키지 상품이 아니면 결코 가지 않을 것 같은 나라, 룩셈부르크(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를 포함하는 베네룩스 3 국도 여행지에 포함되어 있었다)도 거쳤다. 엄밀히 말하면 땅에 발을 디딘시간보다 이동버스 안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9개국에 발을 디딘 건 분명한 사실이었기에 본전을 뽑고도 남는 여행이라 여겼다.


시간에 쫓기는 여행을 하다 보니 식사시간도 무척 짧았다. 길어야 1시간 정도였는데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일정이 꼬이는 바람에 10분 안에 밥을 먹어야 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당황하기는 가이드도 마찬가지였다. 일정에 차질이 없어야 한다면서 ‘10분’을 계속 강조했다. 우리는 잘 훈련된 군인들처럼 차례로 착석했다. 음식이 세팅되자마자 뒤 빛의 속도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식사가 끝났을 때 분침은 정확히 10분 후를 가리키고 있었다. 덕분에 다음 여행지로 무사히 떠날 수 있었다. 지금은 덜 하겠지만 해외여행 초창기에는 정말 그랬다. 한 나라라도 더 봐야 하고, 한 곳이라도 더 가서 인증샷을 남겨야 했기에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개가며 썼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유명 관광지로 끌려 다니며 눈도장 찍기 바빴다. 퉁퉁 부은 얼굴로 일어나 조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강행군을 위해 마음을 다졌다. 느긋하게 차라도 마시며 쉬어가는 것을 시간 낭비라 여긴 건 함께 간 여행자 모두의 일치된 생각이었다. 다음 목적지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11박 동안 유럽 9개국을 완주하는 놀라운 계획을 실현하고야 말았다. 본전을 뽑아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내가 믿었던 본전’이나 ‘효율’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한 템포 쉬어가기 위해 떠나는 것이 여행이다. 그런데 여행지에서조차 효율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최소 시간, 많은 장소에 방점을 찍은 채 강행군을 이어간 것은 고도 성장기를 거쳐오는 동안 유전자에 새겨진 암울한 그림자 때문이었을까.


더 이상 패키지여행을 하지 않는다. 인솔자의 깃발 아래 우르르 몰려다니는 여행을 무시해서도, 가성비에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부자라서 그런 게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본전의 개념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여러 곳을 가기보다는 한 도시에 오래 머물면서 그곳의 하늘과 노을, 바람을 느끼고,  새벽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달리는 대신 동네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책 한 권 읽는 여유를 부리는 것이 제대로 본전 뽑는 여행이란 생각이 들어서이다. 취향과 무관하게 남들이 가니까 나도 가야 한다거나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여행의 방식은 더 이상 나와 맞지 않았기에 그 속에서 본전을 찾을 수 없었다.


11개국을 도는 여행 중에 찍었던 사진은 표정이 없다. 유명 관광지의 상표만 덕지덕지 붙은 처치 곤란한 기념품으로만 남았다. 이후에 남편과 둘이, 혹은 가족들과 오붓하게 다녀온 여행사진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풍부한 표정이 있다. 오드리 헵번을 흉내 내며 계단을 내려오다 젤라토가 코에 묻어 활짝 웃고 있는 사진, 주인이 식사를 하는 동안 얌전히 기다리는 댕댕이, 바람에 아무렇게나 나부끼는 색색의 빨래, 낡은 담벼락에 피어 있는 이국적인 꽃들로 채워진 풍경은 그때의 감정, 바람과 햇빛까지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다시 그곳으로 갈 수 있다면 그 카페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지, 키 큰 나무는 무탈한지 살펴보고 친절한 가게 주인아저씨의 안부도 묻고 싶다.  


팬데믹이 막을 내리고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각자만의 방식으로 본전 뽑는 여행을 하시길… 삶의 시계는 조금 천천히 돌아도 괜찮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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