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스의 세계에서 코스모스를 찾으려 한 인간의 어리석음
논픽션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플롯이 흥미로웠다. 마치 한 편의 뛰어난 소설을 보는 듯한 유려한 작가의 솜씨에 어느새 흠뻑 빠져 들었다. 영화 <식스 센스>처럼 역대급 반전미도 갖추고 있다. 이렇게 말한다고 형식만 훌륭한 책이라고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지적인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통찰력 번뜩이는 문장이 가득하다.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두고 하는 말이다. 과학기자가 쓴 과학 논픽션이라는 장르는 누군가에게는 결코 환영받지 못하는 종류의 책일 수도 있지만 이런 편견조차 단번에 깨 주는 책이기도 하다.
유명 유튜버가 너도 나도 추천했고 파리목숨과도 같은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좀처럼 내려오지 않았던 건 물론, 주례사 서평으로 넘쳐났던 책이라 오히려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다. 제법 오랫동안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그래서였다. 모두가 열광하는 천만 영화는 결코 보지 않는 이상한 반골(?) 기질이 한몫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책을 집어 들었다. 이상한 제목처럼 표지도 종잡을 수 없었다. 인어와 물고기가 심해를 함께 헤엄치고 있는 그림은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룰루 밀러의 세계에 접속했다.
연인과 헤어지고 정체성 혼란과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던 작가는 분류학자이며 생물학자인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에서 답을 찾고자 한다. 데이비드는 어류의 분류 범주를 만드는데 평생을 바친 학자였다. 혼돈이 인간을 불안하게 만든다고 생각한 그는 혼돈을 제거하고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분류화, 범주화 작업을 평생의 업으로 삼았다. 온갖 고난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고, 불행하고 암울한 날에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비결이 그녀는 궁금했다. 그에게서 삶의 의미를 찾는 법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은 건 그래서였다. 19세기 분류학자 의 서사 속으로 작가가 발을 들여놓는 순간이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 그는 누구인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의미 상실, 정체성 혼란으로 괴로워하던 작가가 데이비드의 서사를 통과해 다다른 곳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책의 리뷰로 대신하려 한다.
자연계에서 신의 영향력을 거둬간 진화론을 받아들인 조던은 스스로 신이 되었다. 신의 자리에 앉은 그는 카오스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고자 했다. 물고기를 구분하고 인간을 우수한 인간과 열등한 인간으로 나누었다. 장애인과 노숙자들에게는 강제 불임수술을 시켜 열등한(?) 유전자가 더 이상 전해지지 않도록 하는데 앞장섰다. 연구실적을 한 순간에 날려버린 화재나 대지진 속에서도 낙담하지 않았던 과학자의 확고부동한 신념은 인간에게로 그 영역을 확대한다. 극단적이고 왜곡된 방식으로 질서를 만들어내려 했다. 데이비드는 놀라운 집념과 투지로 어류 분류학에 몰두한다. 덕분에 그가 생존할 당시 알려진 어류의 ⅕ 이상을 명명하고 분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집념은 신념이 되었고 맹목적인 신념은 비극을 낳았다. ‘분류’를 향한 그의 집착은 어류에 그치지 않았고 유색인종, 여성, 노숙자 등 인간에게로 향했다. 우생학을 지지하고 자신의 질서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조작도 서슴지 않았다. 어류를 최하층으로 분류하고 인간을 최상위의 지위에 올려놓은 건 그의 오만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데이비드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희망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업적에 가려진 과학자의 어두운 실체 앞에서 작가는 참담함을 금할 수 없었다.
책의 제목인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인간을 우위에 두고 어류를 가장 열등한 생물체로 분류한 것 자체가 의미가 없음을 말한다. 대자연 앞에서는 생명을 가진 똑같은 존재일 뿐이다. 인간이 물고기보다 뛰어난 것도, 물고기가 인간보다 모자란 것도 아니다. 인간의 편의대로 마음대로 범주를 정한 뒤 그곳에 온갖 생명체를 욱여넣었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가 다른 종족을 물리치고 살아남은 이유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에서 찾았다. 상상력 덕분에 사피엔스는 국가와 법을 만들었고 화폐를 유통시키고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모두가 실체 없는 상상력의 산물이다. 하지만 상상력은 때로 부작용을 낳았다. 생태계에 무수하게 그어진 선이 그것이다. 인간의 상상력의 소산인 작위적인 분류법이 어떤 끔찍한 오류를 범했는가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범주화는 결국 비교로 이어진다. 평생을 누군가와 비교당하며 살아야 하는 현대인의 숙명은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다는 명목하게 저질러진 범주화, 분류화의 결과는 아닐까. 불안을 그림자처럼 매달고 다녀야 하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 것도 프레임의 덫에 걸린 까닭은 아닐까. 결국 ‘어류’라는 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조던이 평생을 바쳤던 생물의 범주는 존재한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상상력으로 멋대로 그어 놓은 보이지 않는 선, 멋대로 인류를 최상위 생물체로 상정한 프레임 속에서 ‘어류’ ‘물고기’라는 분류체계는 그 의미를 상실했다.
오랜 방황과 탐구의 결과 작가가 당도한 곳은 어디일까? 애초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었을까?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의 계층 구조에 매달리는 것은 더 큰 그림을, 자연의 “생명의 전체 조직”의 복잡다단한 진실을 놓치는 일이다. 좋은 과학이 할 일은 우리가 자연에 ‘편리하게’ 그어 놓은 선들 너머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 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저자가 당도한 통찰은 확신을 경계해야 함을, 범주화 속에 넣어 단순화시킴으로써 저마다의 다양성을 외면하는 인간의 오만함 대한 깨달음이었다. 비단 동식물에게만 적용되는 말은 아닐 터이다. 인간 역시 ‘우등한 사람’과 ‘열등한 인간’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는 존재이며 범주화할 수 없는 개개인의 고유함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오랜 방황 끝에 작가는 양성애자라는 정체성으로 괴로워했던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세상의 잣대로 구분되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고유함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책장을 덮은 뒤 밀려든 감정은 혼란스러움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과학이, 팩트라고 믿었던 것이 진실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막막했다. 물고기를 포기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다. 하느님을 부정하는 교인처럼 죄책감이 들었고 허탈하고 아쉬운 마음도 밀려왔다. 근대 이후 신의 자리를 대신한 과학을 부정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룰루 밀러라는 멋진 작가와 떠난 여정 속에서 편견과 오해의 탑 속에서 조금씩 빠져나올 수 있었다.
우수한 유전자를 타고난 자연계 최상위의 존재라고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는 인간이 사실은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 앞에서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과학자의 일이 의심하고 증명하는 일이라면 확증편향에서 벗어나야 진실에 가까이 갈 수 있다.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가정을 버리지 않아야 오류를 최소화할 수 있다. 비단 과학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님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카오스의 세계에서 코스모스를 찾으려 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과학자 한 사람의 일로 미루어서도 안 될 것이다.
쓰고 나니 결국 주례사 서평을 더한 셈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