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차별주의자> 라우라 비스뵈크
지금도 자주 회자되는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 연설문의 요지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 해야 한다고 그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이에 대해 <내 안의 차별주의자>의 저자 라우라 비스뵈크는 ‘애플의 성공을 잡스 개인의 사랑과 열정의 결과인 양 선정하는 것은 지구 반대편의 애플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수천 노동자의 땀과 노동을 외면하는 짓이다. 스티브 잡스가 일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다 이들의 노동 덕분이다’고 잘라 말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말속에 담긴 차별적인 시선을 겨냥한 일침이다. 물론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는 불리한 환경 속에서 역경을 딛고 성공했을 수 있고, 열정을 갖고 일을 하는 것 또한 당연히 나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개인이 처한 상황이나 여건을 고려하지 않은 채 ‘좋아하는 일’만 할 수 있는 여유로운 상황에 놓인 이들이 얼마나 될 것이며, 그렇기에 ‘좋아하는 일’ 대신 ‘해야 하는 일’을 묵묵히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린 사람들의 애환은 묻힐 수밖에 없다. 또한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것이 너도 나도 따라야 할 명제가 되는 순간,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차별적인 시선 안에 갇히게 된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할지라도 모두에게 동일한 잣대가 되는 순간 거기에 닿지 못하는 사람은 배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굶어 죽은 연극배우의 사례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꿈과 열정 뒤에 가려진 임금과 복지 문제를 고려하지 않은 채 그저 불행한 개인사로 치부하게 되면 삶은 외로워진다. 일에 대한 열정은 없지만 하루하루 성실하게 일한 대가로 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이 땅의 수많은 가장들은 ‘자아실현’도 잊은 채 노동시장으로 내몰린 불행한 희생의 제물로 전락할 우려도 있다.
저자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유기농 음식을 먹고, 공정무역 커피를 마시고, 유기견을 입양하는 것도 차별적 행동이라라는 그의 말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환경에 무해한 음식을 먹고 노동착취에 항의하고, 동물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을 비난하는 게 아니다. 그런 태도와 말속에 숨은 욕망과 태도를 문제시 삼는다.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행동과 태도 이면에는 윤리적 소비를 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무시가 깔려있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느끼는 마음의 밑바탕에는 돈 없고 시간 없고 소비문제에 무지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마음이 있다. 결국 또 다른 의미의 선긋기인 셈이다. 윤리적인 행위를 하고 도덕적인 인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조건, 다시 말해 경제적이고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야 한다. ‘의식이 없다’는 한 마디 말로 자신과 구분 지은 뒤 경계 밖으로 밀어내고 도덕적 우월감에 젖어드는 사람들의 태도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소비가 ‘정체성’을 표현하는 시대가 되었다. 인스타그램에 멋진 여행지나 명품을 언박싱하는 사진을 올리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명품’으로 포장하기 위해서다. 같은 이유에서 환경을 위해 육식을 포기하거나, 노동착취에 항의하기 위해 공정무역 커피를 마시는 것은 남과 다른 ‘올바른’ 소비를 하는 ‘의식 있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해 준다. 명품을 소비하든, 친환경 제품을 소비하든 기업은 아무 상관이 없다. 당신은 ‘명품 인생’이고, 당신은 ‘윤리적으로 우월한 사람’ 임을 속삭이는 광고를 되풀이함으로써 소비를 부추기면 그만이니까.
이쯤에서 우리는 ‘차별’이란 말의 의미에 대해 곱씹어야 할지도 모른다. 드러내 놓고 ‘너는 나와 달라’라고 선을 긋는 행위만이 차별일까? 뉴스에 등장하는 갑질, 외국인 노동자의 가혹한 현실, 젠더, 이주민 문제 등 확연히 드러나는 차별 외에 사회 구조 안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그래서 차별인지 조차 알기 어려운 차별적 시선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던 건 아니었을까. 대놓고 조롱하고 ‘다름’을 강조하는 행위는 개인의 무지 혹은 인성 탓으로 돌릴 수 있지만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구조적인 모순과 이로 인한 차별은 차별인지 조차 모르는 채 행해지기 때문에 은밀하고 그래서 더욱 위험하다. <내 안의 차별주의자>는 너무나 당연시하던 명제 속에 숨은 차별과 구조와 맞물려 사회 시스템 속으로 완벽하게 스며든 차별을 목도하게 해 주고 신념과 취향마저도 차별로 변질되는 과정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남들이 뭘 몰라서 저러는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결단코 단 한 번도 없는가?’라는 강렬한 표지 문구에 끌려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나의 답은 당연하게도 ‘그렇지 않다’이다. 나와 의견이 다르면 틀린 거라 단정 지었고 ‘왜 저렇게 생각이 없을까?’ 라며 모자란 사람 취급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분법은 참 편리한 도구다. "조직에서 나오기 전에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누가 나쁜 놈인지 알았다. 지금은 그런 확실함이 사라졌다.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우울증을 앓는다." 청소년 시절 6년 동안 네오나치 집단에서 활동했던 바이스게르버라는 독일인이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목표가 사라진 세상에서 적개심은 대중의 단결을 이끌어 내는 강력한 불쏘시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복잡한 세상을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나누면 마음이 편해진다. 이분법 속에서 자신의 자리는 언제나 ‘선’이고 ‘악’의 자리는 자연스럽게 타인에게 배정된다. 명확하고 깔끔 논리에 의해 돌아가는 세상은 단순하고 명확하다. 타인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은 세상의 질서를 깔끔하게 정리하기 위해서다. 그 한복판에 중세 마녀가 자리하고 있다. 마녀 하나만 죽이면 세상은 다시 평온해지고 질서정연해 지는 기분 속으로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무력감이 사라지고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가짜뉴스가 판치는 것도 아무 정보도 없어서 혼란스럽고 불안한 상황보다는 거짓 정보라도 들어야 안심이 되는 심리 때문이다. 하지만 이분법에 사로잡혀 선을 긋고 편 가르기를 일삼게 되면 증오와 대립을 부추겨 이익을 챙기려는 집단에게만 득이 된다. 선과 악을 무 자르듯이 명확하게 나눌 수 있다는 생각은 실제 세상과도 한참 거리가 있는 판타지일 뿐이다.
저자는 젠더에 대한 언급도 빼놓지 않는다. 자라는 동안 남성들은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끊임없이 교육받는다. 심지어 평생 딱 세 번만 울어야 한다고 강요당한다. 하지만 이는 결국 감정을 억압하라는 의미이며 슬픔과 절망과 분노를 억압하다 보면 결국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AI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모르는 사람은 남의 감정을 알 수 없고 알 수 없으니 공감할 수 없다.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진다. 고통과 아픔을 표현하는 것이 여자 같은 짓이라고 비난당하다 보면 결국 화석같이 굳은 심장의 사람이 되고 만다. ‘연약함과 공감은 여성의 특징이 아니다. 인간의 특징이다. 그런데 남자들은 그 인간의 특징을 외면하라고 배운다’는 말을 통해 ‘남자다움’ 혹은 ‘여자다움’ 속에 내재한 차별의 패러다임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생각이 없네’ ‘뭘 모르네’라는 말로 쉽게 단정 지을 정도로 납작한 존재가 아니다. 저마다의 사정이 있고 자기만의 논리도 갖추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를 무지하다고 낙인찍는 순간 이해하려는 노력도 공감할 여지도 사라진다. 구조적으로 내재된 모순과 차별에는 눈 감은 채 모든 것을 개인의 불행 탓으로 미뤄 버린다. 부조리하고 예측 불가능한 세상에서 자신의 안온한 세계 하나는 지킬 수 있다고 믿으면서… 공감과 연대가 사라진 세상이 정작 더 불행하다는 사실은 망각한 채…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등을 원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개방성’과 ‘관용’ 점수를 엄청나게 높게 주면서도, 아니 오히려 그렇다고 믿기에 더욱 상대와 나를 구분하고 경계 지으려 한다.” 라우라 비스뵈크의 마지막 말은 우리 안의 차별주의자를 겨냥한 비수였다.
‘남들이 뭘 몰라서 저러는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결단코 단 한 번도 없는가?’라는 물음에 ‘예스’라고 대답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읽어봐야 할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