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양형 이유> 박주영
“법정은 모든 아름다운 구축물을 해체하는 곳이다. 사랑은 맨 먼저 해체되고, 결국 가정도 해체된다. 재산을 나누고 아이도 나누다. 사랑의 잔해를 뒤적이고 수습하다 보면 법정이 도축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p45)
“형사 판결문 말미에는 '양형 이유'라는 란이 따로 있다. 공소사실에 대한 법적 설시를 모두 마친 후 이런 형을 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히는 것이다”
박주영 판사의 양형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저녁이 있는 삶을 추구하는 이 시대 대한민국에서, 삶이 있는 저녁을 걱정하는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다수 존재한다는 현실은 서글프기 그지없다.’ 어려운 법률용어와 가뭄으로 바싹 말라 갈라진 논처럼 건조한 문장을 예상했던 내 짐작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의 양형문은 한 편의 아름다운 시 같기도, 참담한 마음을 애써 다스리며 꾹꾹 눌러쓴 절절한 읍소이기도, 누군가의 마음을 다독여주는 따뜻한 에세이 이기도 했다. 판결문이라기보다는 간절한 기도문에 가까웠다. 글을 읽다 보면 고개 숙인 피고와 핏기가 사라진 창백한 얼굴의 피해자가 떠오른다. 판사의 미간에 깊이 파인 밭고랑 같은 주름도 보이는 듯하다.. ‘판결문이라는 건조하고 비정한 서사, 그 장르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사연들, 그 비감한 서정을 풀어놓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라는 토로에서 알 수 있듯이 쓰지 않고 그는 견딜 수 없었으리라. 법이라는 테두리에 갇혀 아우성치는 목소리를 더는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법정에 선 피고는 간절한 눈빛으로 판사를 바라본다. 그의 말 한마디에 자신의 인생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비빌 언덕이라고는 없는 약자들에게 판사의 말 한마디는 중세 시대 신의 심판을 기다리는 무력한 인간과 비교해도 크게 잘못된 비유는 아닐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며 어떤 감정도 개입해서는 안 되고 결과만으로 얘기해야 하는 판결문의 서사로는 담을 수 없는 내용이 양형의 이유에 담겨 있다. 개별적인 인간은 사라지고 ‘피고’라는 법률적 명칭으로 불리는 한 인간의 삶을 조금이나마 복원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기도 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법이라지만 결국 사법시스템의 주인은 인간이다. 하지만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명제가 진실이 아님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박제된 지식일 뿐 현실과는 심각한 괴리가 있다는 것쯤은 살다 보면 금방 알게 되니까 말이다. ‘인간을 위한 법이 정작 인간다움에서 가장 멀다’는 아이러니 앞에서 그는 자주 좌절했을 것이다. 수십억을 횡령한 경제사범은 법망을 잘도 빠져나가지만 일당 10만 원을 벌려고 기꺼이 보이스피싱 조직의 수금책이 된 이는 어김없이 피의자 신분으로 법정에 서는 현실 앞에서 법의 한계와 자신의 무기력을 한탄했을 것이다.
법정에 선 한 사람의 서사는 판결문 몇 줄로 요약되지 않는다. 감정을 걷어내고 증거가 없어서 입증이 안 되는 사실도 잘라내고 나면 한겨울 나목처럼 앙상한 몇 줄의 문장만 남는다. 서사가 사라진 자리는 억울함이 남아 오래도록 아물지 않은 상처가 된다. 하지만 인생이 한 권의 책이라면 죄를 지은 페이지만 그 사람의 삶이 아니다. 그전까지 살아온 인생이 있고 죄를 지은 이후의 삶도 살아가야 한다. 판사의 자리가 두려운 건 전체 책의 잘못 인쇄된 한 페이지에만 집중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판사를 떠올리면 권위주의에 물들어서 불공정한 판결을 남발하고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냉혈한 인이거나 인간성이 제거된 AI 같은 사람의 이미지가 상상되곤 했다. 하지만 박주영 판사의 글 속에서 나는 한 사람의 ‘연약한 인간’을 보았다. 타인의 고통에 눈감지 않고 누군가의 삶을 재단할 권한이 자신에게 있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는 한 인간이 있었다. 밀려드는 사건과 읽고 또 읽어도 줄지 않는 서류의 탑 앞에서 언제나 부족하기만 한 시간 탓을 해 보지만 한 페이지도 허투루 읽지 않겠다는 안간힘이 그가 쓴 양형문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침 드라마보다 더한 막장 인생의 한가운데서 그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모든 같은 인간이라는 믿음을 견지한 채 어느 한쪽으로도 추가 기울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인간은 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져 기계적으로 일을 처리하게 마련이다.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일에서 조차 그렇다. 박주영 판사는 이를 경계하며 숫자와 문장에 갇힌 숨은 의미를 찾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의 글 속에 책과 영화에 대한 얘기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법률 지식만으로 한계가 있을 때, 사건의 드러나지 않은 이면까지 꿰뚫어 보는 눈을 갖지 못한다면 누군가의 생을 나락으로 밀어 넣을 수도 있기에 책이나 영화를 통해 타인의 삶을 이해하려 노력했을 것이다. 판사라는 자리의 무거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책과 영화에 의지해서라도 사람의 마음에 다가가려 애썼을 것이다.
글을 읽다 보니 판사도 작가와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미끄러진 인생에 개입해서 그들의 삶을 엿보고 그 기록을 판결문에 남기는 작업은 결국 글쓰기라는 행위를 통해 이루어지니 말이다. 원고 마감이 있듯이 판결문도 재판 일정에 따라 작성해야 하고 기일에 쫓겨 판결문을 써야 하는 것이나 마감에 쫓겨 원고를 써야 하는 작가나 형편은 별로 다르지 않다. 누군가의 삶을 상상하고 기록하는 게 작가의 일이라면 죄를 지은 사람의 사연과 서사를 꼼꼼하게 들여다 보고 기록해야 할 의무가 판사에게 있는 것이다.
사진으로 본 박 판사의 표정은 고요했다. 희끗희끗한 흰머리는 세월을 감출 수 없었지만 뿔 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빛은 형형했다. 판결문 한 줄로 가족을 떼어 놓고, 한 사람을 오랫동안 세상과 격리시킬 수 있는 무시무시한 권력(?)의 소유자, 세상 무서울 것 없기에 누구와도 타협을 거부하는 꼬장꼬장한 법조인의 이미지보다는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지고 있는 구도자의 모습에 가까웠다. ‘똑같은 사건이 없듯, 법정에 선 당사자의 고통과 눈물 역시 제각각의 색조를 띠는데, 이를 판에 박힌 몇 마디 말 틀 안에 욱여넣는 것이 뭔가 부조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자신이 쓴 양형의 이유에 대해 언급한 그의 마음을 이해해 버려서인지도 모른다. 그는 또한 자신의 판결이 사회 구성원에게 위로보다 상처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의 바람대로 박주영 판사의 책을 읽고 위로받았다기보다 마음이 아팠다. 사회 구성원의 일원임에도 여전히 타인의 자리에 붙박이처럼 서서 꼼짝 않는 내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혹한에 박스며 신문지로 겨울을 나는 사람들이 있다 한겨울 눈을 털며 들어선 지하도가 생각보다 훈훈하다면 겨울밤 지하도를 온몸으로 덮힌 사람들을 한번 떠올려봐야 마땅하다”(p 258)
이런 마음을 가진 판사앞에서라면 조금은 덜 외로울 것 같다. 책을 읽고 가슴이 뜨거워진 건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