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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Oct 12. 2023

공간이 사라지면 존재도 사라진다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공간이 사라지면 존재도 사라진다



유년기의 대부분을 보낸 집은 오래된 주택이었다. 방은 작고 공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시골에서 할머니라도 올라오시는 날이면 우리 자매들은 좁은 방에서 할머니의 담배 연기를 맡으며 잠들어야 했다. 형편이 좀 나아지면서 새로 집을 짓게 되었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나만의 공간이 생긴다는 사실에 잠이 오지 않았다. 공사 현장으로 출퇴근하다시피 하면서 집이 올라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기초공사도 안 된 콘크리트 바닥이었지만 머릿속에서는 이미 집이 지어지고 있었다.  ‘저기가 내 방이구나’ 


새 집에 첫 발을 들여놓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 낡고 추레했던 주택은 멋진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넓고 환한 거실에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귀부인처럼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고 하늘색 싱크대와 원목 식탁이 놓인 주방은 TV 드라마에서 보던 것과 유사했다. 드디어 내 방 앞에 섰다. 흥분과 기대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화장대와 침대, 오디오까지 들여놓은 방은 작은 성처럼 우아하고 안온했다. 나는 성 안에서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의 목록을 하나씩 지워가기 시작했다. 





집을 짓고 나서 1층은 우리 가족이 쓰고 2층은 세를 놓았다. 서너 살의 어린아이가 있는 젊은 부부가 세입자로 들어왔다. 귀여운 외모에다 붙임성까지 있는 아이는 틈만 나면 쪼르륵 1층으로 내려왔다. 우리는 천사 같은 아이에게 흠뻑 빠져 과자도 쥐어주고 같이 놀아주기도 했다. 엄마 등에 업혀 잠든 날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궁금해서 죽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아줌마 방은 어디예요?” 당황한 사이 아이는 주방을 가리키며 해맑게 웃었다. “아, 맞다. 아줌마 방은 여기구나” 자문자답을 하는 모습이 귀여운 데다 아줌마, 즉 엄마 방을 부엌이라고 말한 데에 웃음이 터졌다. 각자의 방이 있는 우리와 달리, 식구들의 밥을 챙기고 간식을 준비하는 엄마가 대부분 머무르는 공간은 부엌임에 틀림없었으므로 이 모습을 제법 오래 지켜본 아이 다운 결론이었다. 요즘말로 웃픈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화려했던 싱글 라이프는 짧고 강렬한 기억만 남긴 채 결혼과 함께 끝났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 해도 공간을 공유하는 일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둘 만의 공간마저도 사라졌다. 나는 아이와 찰흙반죽처럼 엉겨 붙어서 스물네 시간을 붙어 지냈다. 물리적 공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심리적 공간마저도 온전히 내 차지가 될 수 없었다. 온몸으로 존재를 어필하는 작고 어린 생명체는 한시도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고 내 존재는 점차 희미해졌다. 공간과 함께 내 존재도 사라졌다. 





버지니아 울프가 살았던 시대는 1920년대였다. 그녀는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예술가와 가난이 동일시되는 시대에 글을 쓰기 위해서는 경제적 안정이 우선이라는 그녀의 통찰은 여전히 놀랍다. 매슬로우 (Abraham Harold Maslow)의 욕구위계설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생존의 욕구가 위협되는 상황에서 자아실현의 욕구는 남의 집 이야기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창작활동이 금지되었던 여성들은 자신만의 언어를 가질 수 없었고 언어가 없었다는 것은 자신과 사회를 보는 렌즈 자체가 없었다는 말과도 동의어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을 집필한 지 100여 년이 지났다. 그동안 많은 것들이 바뀌었고 여성에 대한 시선이나 권리도 예전과는 달라졌다. 남성에게 귀속된 재산 취급을 받던 존재에서 독자적으로 일을 하고 경제적인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버지니아 울프, 제인 오스틴, 샬럿 브론테와 같은 여성작가들이 슬픔과 우울, 분노와 절망 속에서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은 덕분에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그들이 뿌린 씨앗을 자양분 삼아 읽고 쓰며 생각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하지만 무한반복되는 가사 노동의 굴레와 양육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고 있는 여성의 입지는 창의력이 자라기엔 여전히 척박한 환경이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해서 제 앞가림을 할 줄 아는 나이가 되면서 엄마로서의 책임과 의무도 많이 가벼워졌다. 혼란스러운 시간을 통과하며 그래도 놓지 않은 게 있다는 글을 쓰는 일이었다. 쓰기 위해서는 사색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우연찮게 가지게 된 작업실에서 버지니아 울프를 생각하며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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