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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머그컵, 나의 위로 의식

by 최영인 마음여행자

출근을 하면 가장 먼저 커피를 내린다. 곱게 간 원두 한 스푼을 거름종이에 얹고, 뜨거운 물을 조금씩 천천히 붓는다. 커피 알갱이가 숨을 쉬듯 부풀었다가 가라앉는다. 다시 물을 붓는다. 이 과정을 몇 차례 반복하면 맑고 투명한 커피가 머그잔에 모인다. 따뜻한 액체가 컵을 채우고, 그 열기가 손끝에 전해지면 비로소 하루가 시작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여행지에서 구입한 이국적인 컵도, 특별한 선물로 받은 잔도 많지만, 늘 손이 가는 건 오래된 하얀 머그잔이다. 입구가 약간 넓고 손잡이가 단단한 이 컵은, 오래전 이사 선물로 받았던 것이다. 특별히 비싼 것도, 유난히 예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칠이 벗겨지고 손잡이에 실금이 간 모습이 더 정겹다. ‘버릴 때가 됐나?’ 싶다가도, 새 컵을 쓰면 어딘가 어색해 다시금 이 컵을 집어들게 된다.



이 머그잔은 내게 ‘반복되는 루틴’을 부여한다. 물을 끓이고, 원두를 갈고, 커피를 따르고, 첫 모금을 머금는 이 일련의 의식은 마치 내 마음의 리듬을 정돈하는 작은 예식 같다. 마치 누군가 “괜찮아, 오늘도 너 답게 살 수 있을 거야” 라고 등을 토닥여 주는 것 같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컵을 쥐고, 같은 방식으로 물을 끓이고, 같은 방향으로 커튼을 걷는 이 작은 반복은 ‘자기조절(self-regulation)’의 비밀스러운 도구다. 결국, 낡은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건 그 물건이 감정을 지탱하는 구조물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물건을 ‘애착 대상’이라고 부른다. 흔히 사람에게만 쓰는 말처럼 느껴지지만, 우리의 마음은 특정한 사물에도 애착을 품는다. 어린아이가 낡은 인형이나 이불을 끝내 놓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른이 된 우리는 그 인형 대신, 머그컵, 베개, 노트 같은 사물에 마음을 기댄다. 낡고 오래된 그것들을 굳이 버리지 못하는 건, 단순한 습관의 문제가 아니다. 그 안에는 ‘내가 반복해온 삶의 구조’가 담겨 있다.



삶이 어지러울 때 우리는 루틴을 찾는다. 루틴은 예측 가능성을 회복시키고, ‘내가 뭔가를 통제하고 있다’는 감각을 되살려준다. 그 속에서 불안은 점차 사라지고, 마음은 제자리를 찾는다. 결국, 반복은 삶을 관리하는 방식이자 스스로를 확인하는 의식이다. 이 작은 반복 속에서 나는 다시금 ‘나’ 라는 존재의 경계를 선명히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집 안 구석에 고이 모셔둔 낡은 물건들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은 단순한 정리정돈이 아니라, 마음의 지도를 살피는 시간이다. 언젠가부터 쓰지 않지만 버리지 못한 볼펜, 잉크가 반쯤 마른 만년필, 몇 장 남지 않은 여행 엽서, 기념일에 받았던 작은 촛대… 이 모든 것은 어떤 시절의 나를 품고 있다. 이 사물들은 단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의 풍경이 머물던 자리다. 그래서 버리기가 어렵다. 그것을 버리는 일은 마치 그 시절의 기억이나 감정을 내 손으로 지우는 일처럼 느껴져서 그렇다. 비록 지금의 내가 쓰지는 않아도, 그 사물은 한때 나를 다독였고, 기다려주었으며, ‘나’로 있게 해 준 힘이었다.



사물은 기억의 저장소이자, 감정의 프레임이다. 그리고 그 감정은 루틴을 통해 반복된다. 머그잔에 물을 붓는 행위, 같은 노래를 틀며 하루를 시작하는 순간, 매일 밤 같은 자리에 앉아 노트 한 장을 채우는, 이 사소한 반복은 ‘나만의 방식’이다. 그 방식이 무너지면, 나는 어딘가로 흩어질 것 같은 불안을 느낀다. 루틴은 내가 만든 질서이자, 나를 지켜주는 울타리다. 그리고 그 울타리를 구성하는 벽돌 하나하나가 바로 익숙한 사물들이다. 오늘도 나는 그 사물들을 통해 나를 붙들고, 매일 새롭게 나를 짓는다. 반복한다는 것은 같은 하루를 사는 일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나를 재창조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 사소한 반복 속에서, 나는 나의 중심을 다시 선명히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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