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찾아보는 유튜브 채널이 있었다.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어 필요할 때마다 챙겨보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채널이 피곤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운영자가 사용하는 언어 때문이었다. 그는 마치 세상에 ‘너무’라는 단어밖에 모르는 사람 같았다. 모든 것이 ‘너무’ 예쁘고, ‘너무’ 멋지고, ‘너무’ 맛있고, ‘너무’ 훌륭했다. 그런 식의 말투가 반복되다 보니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도무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살다 보면 누구라도 ‘너무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수 있는 상황에 처한다. 하지만 매 영상마다 이어지는 ‘너무’ 말 대잔치는 이 부사의 의미를 퇴색시킬 뿐 아니라, 영상의 몰입도마저 떨어뜨렸다. ‘너무’라는 단어에 자꾸만 발이 걸려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나는 구독을 취소하고 말았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나는 왜 이토록 ‘너무’라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걸까? 아마도 ‘너무 미안하다’, ‘너무 안됐다’, ‘너무 사랑한다’는 말 속에 과연 얼마만큼의 진심이 담겨 있는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네가 너무 좋아, 미도리.”
“‘너무’라니, 얼마나?”
“봄날의 곰만큼.”
“그게 무슨 말이야, 봄날의 곰이라니?”
“봄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저쪽에서 벨벳같이 부드럽고 눈이 똘망똘망한 새끼 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네게 말을 건네지. ‘안녕하세요, 아가씨. 나와 함께 뒹굴기 안 하겠어요?’ 그래서 너와 새끼 곰은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그거 멋지지?”
“정말 멋져.”
“그만큼 널 좋아해.”
이후 장면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미도리는 말없이 다가와 ‘나’의 품에 안긴다. ‘너무 좋아’와 ‘봄날의 곰만큼 좋아해’ 사이에는 단순한 표현 방식 이상의 큰 간극이 존재한다. 사랑의 농도와 밀도가 그 차이를 만든다. ‘너무’라는 간편한 표현 대신 여섯 문장을 들여 ‘나’의 절절한 감정을 전했기에 가능한 장면이었다. 감히 말하건대, ‘너무’라는 쉽고도 상투적인 말에 숨은 채 영혼 없는 고백을 반복하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이별을 고민하는 편이 낫다.
부사는 동사나 형용사, 그리고 문장 전체를 수식해 의미를 명확하게 만들어주는 품사다. 잘 사용하면 효과적이지만, 지나치게 사용하면 포장만 거창하고 내용은 빈약한 ‘질소 과자’처럼 실망을 안긴다. 진심이 부족할 때, 부사를 과도하게 활용해 어물쩍 감정을 덮으려는 경우도 많다.
짧은 단어 하나로 인간이 가진 섬세하고 복잡한 감정의 결을 전부 전달하겠다는 시도는 무모하다. 기쁨과 슬픔, 아픔과 외로움, 고독과 허무처럼 인간이 느끼는 수많은 감정을 ‘너무’라는 한 단어에 욱여넣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호모 로퀜스(Homo Loquens)’—말하는 인간이라는 뜻의 라틴어는, 언어가 인간을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속성임을 상기시킨다. 빈곤한 언어는 텅 빈 정신세계와도 다르지 않다.
과도한 수식은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마치 화려한 옷차림에 짙은 화장, 머리에 꽃까지 꽂은 사람처럼 과하면 도리어 매력을 잃는다. 반면 심플한 블랙 셋업에 스카프로 포인트만 준 옷차림은 우아하고 세련된 멋을 준다. 언어도 그렇다. 지나친 수식어 대신 자신만의 언어로 감정을 전할 때, 비로소 진정성이 전달된다. ‘봄날의 곰처럼 좋아해’라는 말이 가슴을 울리는 사랑의 고백으로 다가온 것도 바로 그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