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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등단했습니다

by 최영인 마음여행자

작년 연말, 문예지에 투고한 글이 수필 부문 신인문학상을 받아 오랜 염원이었던 등단작가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제 글이 문학성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행복하고 기뻤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 이후로 한 줄도 쓰지 못하는 '글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왜 쓰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부터 시작해, “내가 쓴 글이 우연이 아니었을까?”, “앞으로도 쓸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는 글이 될 수 있을까?” 무수한 질문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습니다.


처음엔 그저 좋아서 썼습니다. 문장이 나를 위로해 주었고, 글쓰기를 통해 슬픔을 정리하거나, 의미 없는 하루에 작은 온점을 찍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등단 작가’라는 타이틀 하나가 그 단순한 기쁨을 낯설게 만들었습니다. 손끝에 잔뜩 힘이 들어갔고, 다 쓴 문장을 지우고, 다시 쓰고, 또다시 지우기를 반복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위안이 될 수 있을 글을 쓰고 싶었지만, 그 마음조차도 조심스럽고 조급하게 느껴졌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헤매다, 깨달았습니다.

문장에 갇히기보다 감정에 다가가자고, 문장을 ‘쓰는’ 사람보다 ‘느끼는’ 사람이 먼저 되자고 다짐했습니다.

요즘의 저는, 다시 조금씩, 천천히 쓰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라, 살아 있음의 증거로 남기고 싶은 말을. 좋아서 시작했던 그때의 마음으로, 다시 한 줄씩 써 내려가려고 합니다. 여전히 서툴고, 느리지만 이제는 그조차도 소중하다고 느낍니다. 쓰지 못하는 시간 또한 글의 일부라는 것을 조금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래 글은 이후 등단 후 발간된 문예지에 실린 당선소감문입니다. 지금 읽어보니 너무 비장해서 웃음도 나지만, 당시의 절박한 심정이 녹아 있는 듯해서 부끄럽지만 공유합니다.




신인문학상(수필부문) 당선 소감문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제 곁을 떠났습니다. 부재하고 나서야 존재를 실감하는 저는 어리석은 자식임이 분명합니다.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는 동안 책상 앞에 앉아 쓰고 또 썼습니다.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마음이었는지 헤아려 보았습니다. 못다 한 말들, 미처 가 닿지 못한 언어, 이제야 꺼내 놓는 뒤늦은 속내까지 낱낱이 글 속에 담았습니다. 오래전 기억을 복기하며 아버지의 삶을 되짚어 보았습니다. 쓰면 쓸수록 무수한 질문이 내 안에서 돋아났지만 답을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젊은 아버지의 고뇌와 늙고 병든 아버지의 외로움에 겨우 닿을 수 있었을 뿐입니다.


마음의 모서리가 닳아 날카롭게 폐부를 찌를 때면 갈급하게 책을 찾아 헤맸습니다. 발화되지 못한 말들의 아우성을 키보드를 두드리며 쏟아냈습니다. ‘내가 쓰는 글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곧 사라져 버릴 언어의 무덤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에 쓰고자 하는 마음을 놓아버린 때도 있었습니다. 명치끝에 걸린 사과조각처럼 좀처럼 튀어나오지 않는 언어 한 조각을 한없이 기다리며 속앓이를 할 때면 재능 없음이 한탄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다시 책상 앞에 앉아 목을 뺀 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좇아 고군분투했던 나날이었지만 제게 세상은 여전히 의문투성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는 당위가 저를 당혹스럽게 하지만 해녀가 물질을 하듯, 문장의 바다에서 저 만의 언어를 건져 올리는 노력을 멈추지 않으려 합니다. ‘글쓰기는 자기 구원의 한 방식’이라는 김영하 작가님의 말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줄 문장이 제 마음에 작은 빛을 던져 주었듯이 보잘것없는 제 글이 누군가의 마음 한 구석에 가 닿을 수 있다면 더 없는 기쁨이겠습니다. 바쁜 일상에서 숨을 고를 수 있는 여유를 줄 수 있다면 큰 행복이 될 것입니다. 계속 쓸 수 있는 용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계속 써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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