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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았어요.”

by 최영인 마음여행자

성공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들을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 있다. “운이 좋았어요.” 처음에는 그저 겸손의 수사처럼 들렸다. 자신의 능력을 내세우는 대신, 운이라는 단어로 성취를 포장하는 듯했다. 그러나 여러 인터뷰에서 이 말이 반복되는 것을 들으며 문득 궁금해졌다. 왜 이들은 하나같이 “운이 좋았다”고 말할까?


물리학자 김상욱 박사는 한 책 프로그램에서 이런 말을 했다. “진화에서 많은 것들이 우연에 의해 선택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인간의 삶 역시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노력이나 의지보다는 ‘주어진 조건’에 좌우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흔히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말로 오역되지만, 실제로는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개체가 살아남는다”는 것이 핵심이다. 생존은 뛰어남의 결과가 아니라, 환경과의 ‘궁합’이라는 말이다. 즉, 지금 우리가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필연이 아닌 ‘우연’의 결과라는 것이다. 인간이 특별히 강해서도, 지적으로 탁월해서도 아니라, 생존에 유리한 환경에 우연히 놓였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내게 묘한 울림을 주었다.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난 것, 전시 상황이 아닌 곳에서 살아가는 것, 교육받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조건이 주어진 것 자체가 사실은 ‘운 좋은’ 일이다. 그들이 말하는 “운이 좋았다”는 말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태도이고, 자신의 위치를 과대평가하지 않는 성찰이며, 우연과 환경이라는 변수에 대한 인식이다. 동시에, 타인의 조건과 환경을 이해하려는 자세이기도 하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전적으로 내 능력 덕분만은 아니다. 수많은 보이지 않는 우연과 타인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겸허한 자각이 담겨 있다. 반대로 자신의 성취를 오직 개인 능력과 노력의 결과로만 여기는 순간, 우리는 타인과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감각을 잃고 만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위험한 오만이다.


사람은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통해 자존감을 형성하지만, 그 믿음이 과도해질 경우 삶의 결과를 오롯이 자기 책임으로 돌리고 타인의 조건과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나도 그랬다. 실패하면 주변 탓을 했고, 성공하면 오롯이 내 실력이라 믿었다. 내가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참 운이 좋았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지만, 부모님의 배려로 대학교육을 받았고, 20년 가까운 직장생활을 유지하고 있으며, 가족 모두 무탈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만하면 충분히 감사한 삶 아닌가. 이건 단순히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자”는 식의 도덕적 훈계가 아니다. “운이 좋았다”는 이 말속에는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들어 있고, 그 태도는 결국 그 사람의 가치관, 나아가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면에서 최근 일부 정치인들이 보여준 오만한 태도는 우리에게 반면교사가 된다. 그들은 “나는 운이 좋았다”는 자각이 아닌, “나는 뛰어난 사람이기에 이 자리에 올랐고, 나보다 못한 사람들은 무시해도 된다”는 태도를 공공연히 드러냈다. 그들이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건, 금수저 부모 밑에서 태어나, 충분한 지원과 기회를 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환원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조롱하거나 배제하는 태도는 ‘운에 대한 통찰’이 결여된 왜곡된 엘리트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들이 단 한 번이라도 “나는 운이 좋았다”라고 생각했더라면, 그 오만과 편견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운이 좋았다”는 말은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둘러싼 수많은 조건들을 인식하고, 그 위에 서 있는 자신을 낯설게 바라볼 줄 아는 통찰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내게 주어진 우연과 환경을 인식하고, 거기에 감사하며, 그것을 어떻게 잘 사용할 것인지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든 능력을 쌓을 수 있지만, 기회는 언제나 내 것이 아니다. 그 차이를 아는 사람, 그 간극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운이 좋은 사람’ 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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