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였던 소녀, 창조적 리더가 되다
우연히 런베뮤 대표의 인터뷰 영상을 보게 되었다. 특유의 무표정과 독특한 의상 속에서 묘한 아우라가 풍겼다. 그녀는 어린 시절 또래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거의 왕따에 가까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외로움 속에서 그녀는 사람을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을 얻었고, 그 습관은 훗날 사업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 자산이 되었다. 소외의 경험이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 세상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하는 창문이 되었던 것이다.
덕분에 런베뮤는 어느새 MZ세대의 성지로 자리 잡았다. 나 또한 문득 그곳이 궁금해졌다. 그녀의 손끝에서 탄생한 공간,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완성된 베이글의 맛을 직접 느껴보고 싶었다.
한여름 뜨거운 햇살 아래 안국본점에 도착했을 때, 평일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한산했다. 인기가 예전만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매장 안에서 먹으려면 여전히 웨이팅이 필요했다. 결국 몇 가지 빵을 골라 테이크아웃을 하기로 했다. 포장을 기다리며 내부를 둘러보니 마치 유럽의 어느 카페에 들어온 듯 세련되면서도 감성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곳곳에 놓인 굿즈들 속에서도 그녀만의 개성과 특별함이 빛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베이글을 맛봤다. 사실 밀도 높은 식감을 좋아하지 않아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의외로 쫄깃한 질감이 입에 잘 맞았다. 곁들인 소스 역시 완성도가 높아 빵과 훌륭하게 어우러졌다. 단순히 ‘인플루언서 효과’라 여겼던 인기가, 직접 경험해보니 충분히 수긍이 갔다.
혼자라는 것은 종종 ‘고독’이나 ‘외로움’의 언어로만 설명되어 ‘결핍’으로만 읽히곤 한다. 하지만 동시에 다수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각도를 확보하는 일이기도 하다. 군중의 중심에 서 있었다면 놓치기 쉬운 작은 움직임들―언어의 미묘한 뉘앙스, 표정과 행동의 어긋남―이 주변에서는 선명하게 보인다. 고립된 자리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시선이다. 그녀는 주변에 있었기에 중심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창조적 회의(creative doubt)’의 뿌리가 된다. 주류의 시각에 안주하지 않고, 당연해 보이는 것들에 의문을 던질 수 있는 힘이다. 중심에 속한 이들이 ‘당연히 그렇다’고 믿는 것을, 주변인은 의심한다. 소외의 경험은 현실을 비스듬히 바라보게 만들고, 이는 기존 질서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로 이어진다. “정말 저렇게밖에 안 되는 걸까?” “다른 방식은 없을까?”라는 질문이야말로 기존 질서가 놓친 틈새를 열고, 새로운 길을 만든다.
혁신은 대개 이런 질문에서 시작된다. 당연하게 여기는 순간 ‘창의적인 사고’는 불가능해진다. ‘왜’ 와 ‘어떻게’가 빠진 상태에서는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외로움이 남긴 흔적은 아픔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남들이 보지 못한 풍경을 바라보게 하는 자산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흔히 ‘주변에 선다’는 것을 실패나 약점으로만 본다. 그러나 주변부야말로 중심을 재정의하는 힘을 품고 있다.
역사 속 창조적 혁신의 아이콘들을 살펴보면 비슷한 결을 발견한다. 스티브 잡스는 입양아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또래와 잘 섞이지 못했지만, 경계인의 자리에서 세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훈련을 했다. 우울과 불안, 여성이라는 이중·삼중의 소외를 견디며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버지니아 울프 역시 마찬가지다. 주변인의 자리가 곧 혁신의 자리였던 것이다.
소외는 한 인간을 무너뜨릴 수도 있지만, 동시에 기존 질서가 보지 못한 틈새를 발견하게 하는 창조적 토양이 되기도 한다. 결국 창조성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주변부에서, 눈을 크게 뜬 이에게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