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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와 이룬 등단작가의 꿈

- 브런치가 열어준 문학의 길 -

브런치 작가가 되기 전에 이미 나는 ‘작가’로 불리고 있었다. 직장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쓴 책이 뜻밖의 빛을 보았고 많은 이의 공감을 산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 호칭이 내 안의 갈증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나는 ‘작가’가 아니었다. 단지 책의 표지 위에 이름이 새겨진 ‘저자’였을 뿐이었다. ‘저자’는 책임을 지는 존재이자, 특정 결과물에 대한 권리를 가진 공식적인 이름표와 같다. 하지만 내가 꿈꾸는 것은 그 이름표와 조금 달랐다. ‘작가’라는 두 글자가 내 삶의 일부가 되기를 바랐다.


‘작가’는 창작의 숲을 거니는 사람, 예술이라는 광활한 영토에서 무(無)를 유(有)로 빚어내는 존재다. 나의 영혼은 끊임없이 그곳을 향해 손짓했지만, 현실의 나는 기존의 지식을 정돈하고 분석하는 일에 묶여 있었다. 문맥에 맞는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다듬는 과정은 익숙했지만, 그것은 창조의 희열이라기보다는 직장 생활의 연장선에 놓인 정교한 노동에 가까웠다. 나만의 색채가 담긴,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 스며든 글을 쓰고 싶다는 갈망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는 불꽃처럼 내 안에서 타올랐다. 브런치에 발을 디딘 것은 그 불꽃을 지필 작은 성냥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오직 ‘쓰고 싶은 글’만을 위한 자유로운 놀이터처럼 보였다.


브런치에서 나는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글을 쓰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영화의 여운, 책 속 문장이 남긴 잔향, 일상에서 스쳐 지나간 찰나의 감정들을 오롯이 담아냈다. ‘이런 책을 써야 해’라는 의무감을 내려놓고, 글쓰기라는 순수한 행위 자체에 몰두했다. 글을 쓰는 동안 나조차 몰랐던 감정의 지도를 발견했고, 세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시선과 마주했다. 글쓰기는 더 이상 목표가 아니라, 내 영혼을 어루만지는 치유의 과정이 되었다. 그렇게 한 편, 한 편 쌓인 글들이 브런치북이 되고, 하나의 온전한 매거진으로 엮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꿈결 같던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출간 제안’이라는 단어가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그토록 염원하던 에세이스트의 꿈이 갑작스럽게, 그러나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내게 찾아온 순간이었다. 브런치에 흩어져 있던 조각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었을 때의 벅찬 기쁨은 첫 책의 출간 때와는 비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온전히 나의 세계, 나의 목소리로 채워진 진정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나는 에세이스트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했고, 덕분에 브런치 에세이 부문 크리에이터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하나의 꿈을 이루면 또 다른 꿈이 피어나는 것은 어쩌면 삶의 순리일 것이다. 에세이집을 냈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등단’이라는 또 다른 꿈을 향해 있었다. 진정한 문학의 세계에 발을 들이고 싶다는 오래된 갈망은, 사그라들지 않고 내 안에 살아 있었다.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수술을 받던 날, 삶과 죽음의 경계, 내가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젊은 날, 소멸과 남겨짐에 대한 두려움이 파편처럼 머릿속을 떠다녔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감정을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글쓰기였다. 병상 곁을 지키며 노트를 끄적이던 그 밤, 글은 더 이상 기술이 아니라 삶의 본질을 파고드는 치열한 행위가 되었다. 그 글을 다듬어 문학잡지에 투고했을 때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러나 며칠 뒤, ‘축하합니다’로 시작되는 메일이 도착했다. 그렇게 나는 수필가로 등단했고, 낯설기만 했던 그 이름은 어느새 내 삶의 또 다른 정체성이 되었다. 브런치는 내게 글쓰기를 다시 가르쳐준 학교이자, ‘쓰는 사람’으로서의 기반을 다져준 공간이다.


등단이라는 목표를 이루고 보니, 중요한 것은 ‘등단’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글을 쓰는 과정 그 자체였음을 깨달았다. 글쓰기는 더 이상 목표를 향한 의무가 아니라, 세상과 나를 잇는 소통의 창이 되었다. 꿈은 이루어졌지만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가장 소중한 목적이 되었기에, 나는 오늘도 묵묵히 ‘나’라는 책을 써 내려간다. 삶의 한 조각을 진솔한 언어로 기록하며, 진정한 작가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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