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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반복될 것인가:조국과 중심-주변의 오래된드라마

by 최영인 마음여행자

전통적인 사유 속에서 '중심(中心)'은 질서와 권력, 진리, 정상성을 상징해 왔다. 반대로 '주변(周邊)'은 무질서하고 열등하며, 중심의 그림자이자 '비정상'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단일하고 절대적인 '중심' 개념을 해체하는 데서 출발한다. 모든 진리는 보편적이고 영원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맥락과 권력 속에서 구성된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때 중심은 자연적이고 자명한 위치가 아니라, 권력과 담론이 만들어낸 가상의 공간일 뿐이다. 그 결과,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주변의 목소리들이 전면에 등장한다. 주변은 더 이상 침묵의 자리나 열등한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언어와 정체성이 교차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활기찬 장으로 재발견된다.


구성주의적 관점은 이러한 통찰을 뒷받침한다.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사회적 상호작용과 언어 속에서 끊임없이 구성된다. 그렇다면 주변은 원래부터 열등한 것이 아니라, 중심의 담론이 그렇게 규정한 위치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주변을 억지로 중심에 편입시키는 일이 아니라, 주변을 주변으로서 존중하고, 그 고유한 가치와 의미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과거에 '비정상'으로 치부되었던 것들이 오히려 다채롭고 독창적인 자산으로 재해석되는 순간, ‘주변’이라는 낙인은 힘을 잃는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빅 브라더’와 ‘당(Party)’은 절대 권력의 중심을 구축하고, 언어와 역사를 조작하며 단 하나의 진리만을 강요한다. “2+2=5”라는 구호는 사실조차 권력의 의지에 따라 재구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에 맞서는 ‘주변’은 윈스턴과 같은 반항자들이다. 그가 일기를 쓰고 금지된 사랑을 나누는 행위는 중심의 서사에 저항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구성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끝내 그는 고문과 세뇌 속에서 ‘빅 브라더’를 사랑하게 된다. 소설은 중심 권력의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며, 동시에 그 힘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오늘날의 현실 역시 다르지 않다. 최근 논란이 된 조국 혁신당의 성비위 사건은 『1984』 속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이 성추행을 ‘사소한 일’로 축소하며 ‘대의’를 앞세운 태도는, 개인의 존엄을 집단의 목표보다 하찮게 취급하는 전형적인 중심의 논리다. 그러나 사건은 결코 그렇게 봉합되지 않았다. 피해자의 목소리와 시민들의 비판적 담론은 중심이 규정한 ‘진리’를 거부하며, 문제를 단순한 개인의 일탈이 아닌 조직 내부 권력 구조의 산물로 재구성하고 있다.


혁신당의 뒤늦은 해명은 중심의 질서를 재확립하려는 시도였으나, 결과적으로 주변의 목소리에 부딪혀 무력화되었다. 이는 단일한 권위와 진리를 내세우는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왜 잘못을 지적받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는 자기 확신 속에서 억울함과 당혹감을 호소할 뿐이다. 문제는, 잘못을 ‘모른다’는 사실 그 자체다. 그것이 반복의 근원이고, 가장 뼈아픈 장면이다. 언제까지 반복될 것인가. 매번 유사한 플롯과 동일한 사사와 결말까지 이어지는 이 진부한 드라마가 정말 지겹지 않은가. 우리는 익숙한 비극의 무대에 또다시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중심은 결코 마지막 답을 쥐고 있지 않다. 중심은 언제나 스스로를 절대라고 믿지만, 그 자리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반대로 주변은 비어 있던 자리가 아니라,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와 목소기로 충만했던 공간이다. 침묵이라 여겨졌던 곳에서 사실은 가장 풍성한 언어가 태어나고, 억눌림이라 불렸던 자리에서 오히려 더 깊은 자유가 숨 쉬고 있었다.


우리가 지금 바라보아야 할 것은 중심의 탑이 아니라,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목소리들이다. 그 목소리들이 서로 얽히며 만들어내는 그물망 속에서 우리는 더 다채롭고 진실한 세계를 만날 수 있다. 결국 “무엇이 중요한가”라는 물음의 답은 하나의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서 서로를 향해 울려 퍼지는 목소리들의 합창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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