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잔뜩 취한 남자가 경찰서 한쪽에서 졸다가 경찰관에게 다짜고짜 묻는다. “아저씨! 첫 키스 기억해요?” “그럼요. 기억하죠.” “그럼 7번째 키스는요?” “네~에?” “에잇!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1등 이외에는 모든 이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씁쓸한 세태를 풍자한 한 때 유행했던 자조적인 유머다. 합격률 1위, 진학률 1위, 소비자 만족도 1위 등등. 유독 1등을 편애하는 우리 사회에서 1등이 아닌 것이 설자리는 별로 없다. 극단적인 경쟁과 승자독식의 구조에서는 1등 이외에는 모두 패배자로 잔인하게 낙인찍는다.
영화 <4등> 속의 주인공, 준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영을 좋아하고 재능이 있지만 만년 4등만 하는 초등학생 준호, 이런 아들이 못마땅한 엄마는 큰돈을 주고 왕년의 수영 천재 광수에게 아들을 맡긴다. 한때 국가대표로 이름을 날렸던 광수는 선수 생활 중 폭력을 견디지 못해 선수촌을 이탈했고 그와 동시에 선수 생명도 끝나 버렸다. ‘정당한’ 폭력을 피한 결과 현재 자신의 삶이 망가졌다고 생각하는 광수는 준호에게 자신이 당했던 것과 똑같은 폭력적인 지도 방식으로 성과를 올리려고 한다.
강도 높은 훈련을 견디지 못하면 어김없이 광수의 폭력이 날아왔고 준호의 몸과 마음에는 시커먼 멍 자국이 남았다. 잠든 아들의 몸에 난 멍 자국을 본 준호 엄마는 안쓰러운 생각이 들지만 곧바로 마음을 고쳐먹고 외면하기로 한다. 준호 엄마에게는 아들이 맞는 것보다 4등이 더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폭력을 견디지 못한 준호는 결국 수영 포기 선언을 하고 아들의 행동에 분노한 엄마는 “네가 무슨 권리로 수영을 그만둬!”라며 고래 고래 소리 지른다. 이성을 잃고 길길이 날뛰는 준호 엄마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추악한 민낯과 데칼코마니처럼 겹쳐졌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서 왜곡된 모성의 볼썽사나운 몸부림이었다.
1등을 못하면 ‘루저’로 취급받는 사회에서 부모들은 습관처럼 “이번 시험에서 1등 하면 휴대폰 바꿔줄게” “공부 못하면 사회에서 낙오자가 돼!”라는 말을 달고 산다. 교육적으로 좋지 않은 말이란 건 부모도 알기에 말을 하고 나서 후회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유치원생부터 이미 무한 경쟁에 내던져진 아이들에게 ‘공부보다 인성’이라는 말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부모의 가치관을 내면화한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서 당당히 자기 몫을 살기는 어렵다. 이미 학창시절 성적에 의해 ‘등급’ 이 나뉘고 부적격 등급을 받고 존재를 부정당했던 아이들은 사회에 나가서도 ‘승자독식’의 가치를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 스펙이 부족하고 능력이 부족한 자신을 탓할 뿐 부당한 노동조건에 의문을 품지 않을 것이다.
경쟁은 학생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부모도 살벌한 경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실적 사회에서 회사의 목표는 오로지 ‘일류 기업’ ‘성과’ 에만 초점이 모아지고 ‘성과’를 내지 못하면 언제 ‘정리해고’의 순열에 합류할지 모르는 불안과 싸워야 한다. 예전에는 ‘개천에서 난 용’이 분명히 존재했었고 열심히 노력하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주어졌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개천의 용’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누군가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을 안고 있는 사회에서 ‘노력’의 의미는 빛바랜 종이처럼 퇴색해 버렸다. 부와 가난을 각기 세습한 ‘금수저’와 ‘흙 수저’ 가 대 극점에서 날카롭게 마주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런 대물림은 당분간 계속 이어질 듯하다.
요즘같이 각박한 세상에서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취업 준비, 스펙 쌓기, 자기계발, 영어공부 등 뼈빠지게 공부하고 애쓰며 살지 않았는가?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가혹하게 노력해도 우리네 삶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무엇이 문제일까? 그동안 죽을힘을 다해 ‘노력’ 한 것은 개별적이고 파편화된 노력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적인 삶이 아니라 공동체를 와해시키는, 각자도생만을 위해 숨 가쁘게 달려온 것이 문제는 아니었을까?
연세대 서은국 교수는 저서 '행복의 기원'에서 이렇게 말했다.
"'becoming(~이 되는 것)'과 'being(~으로 사는 것)'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 재벌집 며느리가 되는 것(becoming)과 그 집안 며느리로 하루하루를 사는 것(being)은 아주 다른 얘기다. 고교생은 오직 대학을 가기 위해, 대학생은 직장을 얻기 위해, 중년은 노후 준비와 자식의 성공을 위해 산다. 많은 사람이 미래에 무엇이 되기 위해 전력 질주한다. 이렇게 becoming에 눈을 두고 살지만, 정작 행복이 있는 곳은 being이다.“
1등만을 목표로 달려가는 사회, becoming을 위해 being을 유예하는 삶이 어떤 의미인지 묻는다. ‘오늘 행복하지 않으면 내일도 행복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잊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하는 일침이다. 행복은 돈이나 물질처럼 저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더 큰 행복을 위해 소소한 행복을 놓쳐서는 안 되는 이유다.
쓰고 있던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을 때, 영화 한 편을 보고 눈물 한 방울 흐를 때, 낙조를 바라보며 덧없이 사라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했을 때 느끼는 소소한 감동이 진짜 행복은 아닐까. 매일매일이 새롭고 설렘으로 다가오지는 않을지라도 하루하루는 여전히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