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했던 건 아버지의 따뜻한 말 한마디 였소

by 최영인 마음여행자

신문이나 인터넷에서 보도되는 가족 간의 상해나 살해 사건을 보며 우리는 자주 충격에 빠진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인류는 자신의 삶을 기록하면서부터 근친 살해 및 상해의 충동에 시달려왔다. 동생을 죽인 카인, 모르고 행한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한 오이디푸스, 정부와 함께 아버지를 살해한 어머니를 죽여야 했던 엘렉트라에 이르기까지 가족 간의 비극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했다.


사는 동안 수없이 많은 상처를 받는다. 사람들은 가족이 아닌 남에게는 절대로 하지 않을 말과 절대로 주지 않을 상처를 가족에게는 당연한 듯 던진다. 아프지 않은 상처가 없지만 특히 가족에게서 받은 상처는 우리를 더 아프게 한다. 그래서 더 힘들고 더 용서하기 어렵다.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사람, 대체 불가능한 관계인 가족에게서 배척받고 외면 받는 경험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한다. 자존감을 위협하는 상처를 지속적으로 받게 되면 모욕을 당한 사람은 자신이 하찮은 존재라고 스스로 모욕을 내면화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나는 살만한 가치가 있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최면으로 스스로를 치유할 수 없게 된다. 남이면 안 보면 그만이지만 가족은 그렇지가 못하다. 오랜 갈등 끝에 관계를 단절하기도 하지만 내면에는 ‘죄책감’이라는 또 하나의 상처가 추가 될 뿐이다. 안 보고 사는 것도 궁극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는 얘기다.


영화 <사도>는 익히 알려진 대로 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적 운명에 관한 이야기다. 사도세자의 이야기가 영화와 드라마에서 반복적으로 다뤄지는 것은 부모와 자식, 가족 간에 일어난 사건의 잔혹성과 참담한 비극성 때문이다. 피로 이어진 부모와 자녀간의 뿌리 깊은 애증에 대한 오랜 질문을 영화는 또 다시 묻는다. 모계가 무수리 출신이라는 태생적인 한계로 인해 열등감과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영조는 귀하게 얻은 아들에게만은 이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가혹하게 ‘세자수업’을 시켰다. 하지만 자유분방한 기질의 소유자였던 사도세자는 영조의 눈에 턱없이 부족하기만 했다. 강박적이고 불안정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영조는 자꾸만 눈 밖에 나는 아들을 향해 '왕으로서 자격이 부족하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냈고 급기야 언어폭력을 비롯한 정서적 학대도 서슴지 않게 되었다.


사도세자의 어린시절은 행복하지 못했다. 생후 백일 되던 날 어머니의 품을 떠나 별도의 전각에서 내인들에 의해 양육되었다. 3~5세가 될 때까지 보모들과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지면서 부모와 맺어야 할 건강한 초기 애착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부모와 정서적 유대 없이 어린 나이부터 받아야 했던 과도한 왕세자 교육 역시 사도 세자의 정서발달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보기 어렵다. 점점 심해지는 아버지 영조의 정서적 학대로 인해 세자는 '의대증'이라는 강박증을 보였고 충동을 통제하지 못해 급기야 사람을 죽이고 때리는 잔인한 행동까지 하기에 이른다. 1757년 초 영조의 왕비인 정성왕후와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가 한 달 간격으로 죽는다. 사도세자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어머니와 할머니가 거의 동시에 죽은 것이다. 이 사건은 사도세자에게 그가 의지할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깊은 상실감을 안겨줬을 것이다.


어린시절의 학대경험은 회복 불가능한 심각한 트라마우를 남긴다. 출생 시 인간의 뇌는 가장 미숙한 기관 중 하나이다. 이는 뇌의 가소성(Plasticity)을 의미하는 것으로 경험이 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좋은 경험이 뇌의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반면 어린시절의 학대경험은 뇌 발달에 있어서 최악의 시나리오가 된다. 지적 능력의 결손을 가져와서 낮은 학업성취, 언어발달의 지연 등의 문제를 낳고 안정적인 애착관계 형성을 저해해서 사회적 관계형성에 문제를 일으킨다. 또 정서조절능력을 상실해서 환경적 자극에 과도하게 예민하고 조그만 자극에도 불안과 공포를 느끼며 자신의 내적 상태를 이해하는데도 어려움을 겪게 된다. 자신의 감정이나 충동의 강도를 조절하는 능력을 상실하면 두려움이나 우울 같은 내면화 문제와 적대감, 공격성 같은 외현화 문제를 유발하게 된다.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한 어린 정조가 겪었을 고통과 상처 역시 만만치 않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트라우마에 시달렸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 죽음을 충분히 애도할 수 없었다. 애도(哀悼)는 ‘슬퍼할 애’ ‘슬퍼할 도’라는 한자어를 쓴다. 말 그대로 슬퍼하고 또 슬퍼하는 것이다. 슬퍼할 때 슬퍼하지 못하면 그것 역시 깊은 상처로 자리 잡게 된다.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아버지에게서 다시 아들에게로 이어지는 트라우마의 대물림이다.


왕이 되기 전 오랜 시간을 궁 밖에서 생활하며 자신의 본성과 욕구를 숨겨야 했던 영조의 무의식 속에는 억압과 공격성, 그리고 시기심이라는 삐뚤어진 탑이 하나 둘 쌓여갔다. 외로움과 슬픔 등 부정적인 감정도 해소하지 못한 채 모아두었다. 모아둔 감정은 가장 만만한 대상, 즉 가족에게 투기하게 된다.


<가족의 발견> 의 저자 최광현은 이를 ‘감정의 무단투기’라고 설명했다. 과도한 스트레스와 긴장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나머지 가족들이 그대로 흡수하게 되어 ‘감정의 대물림’이라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자신의 상처가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떠넘겨지는 것이다. 피해자였던 아들이 아버지가 되어 다시 가해자가 되고 그 아들이 또 다시 가해자 역할을 하는 아버지가 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토록 미워했던 아버지의 방식 그대로 가족을 고통스럽게 하는 이유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란 존재를 온전히 감당하고 그 과정에서 삶을 조금씩 배워나가는 것이 다. 비록 부모가 남긴 상처가 아직 채 식지 않은 핏자국으로 생생하게 남아 있을 지라도 상처를 돌보고 위로하면서 스스로의 삶을 결정해야 한다. 내 상처와 고통을 알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곁에 없다는 데서 오는 고독과 외로움은 힘들고 아프지만 그 상처를 다시 바라볼 수 있다면 치유로 가는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상처는 남아있을지라도 그 상처를 바라보는 시선은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영조는 아들을 사랑했지만 자신의 욕망을 아들에게 투영한 왜곡된 사랑으로 인해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가족사’의 주인공이라는 오명을 남기게 되었다. 완벽한 군주가 되고자 애쓴 왕이었지만 자식을 제대로 사랑할 줄 몰랐던 아버지는 자신과 아들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말았다. 왕과 세자로 만나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연을 끝까지 이어가지 못한 영조와 사도의 비극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줄 때 그 비극은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내가 원했던 건 그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따뜻한 말 한마디 였소”


뒤주 속에서 죽어가며 사도가 했던 말은 ‘사랑’ 이라는 단 두 글자였다. 타자를 만지고 느끼고 이해하는 그 단순한 노력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함을 말해주는 장면이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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