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영화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고 두려웠다. 오랜 시간 고민했다. 결국 마음을 굳히고 주말에 영화관을 찾았다. 바쁜 시간을 쪼개느라 조조 할인을 이용했다. 아무리 조조라지만 생각보다 관객이 너무 적었다.
영화는 2014년 4월, 그날. 아들 ‘수호’를 잃은 슬픔과 절망을 안고 사는 엄마 ‘순남’ 과 가족과 함께 하지 못했다는데서 오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아빠 ‘정일’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오빠의 빈자리가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 어린 여동생 ‘예솔’, 남겨진 세 가족의 이야기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아들 옆에, 그리고 아내 곁을 지키지 못했던 정일은 뒤늦게 귀국을 해서 집을 찾아 오지만 싸늘한 아내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뼈아프게 느끼게 된다. 곧 돌아올 아들의 생일을 준비해 주려는 이웃과 다른 유가족의 배려도 매몰차게 물리친 순남의 상처는 안으로 깊게 곪아가고 있었다. 조금씩 가족 안으로 다시 들어오기 위해 애쓰지만 번번이 밀려나는 정일은 아들에 대해서조차 별로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결국, 생일모임에 참석하기로 한 수호 가족은 그동안 참았던 슬픔과 마주하며 오열한다. 아들의 절친, 이웃, 아들과 딸을 잃은 또 다른 유가족, 아들 덕분에 지옥에서 살아나온 여학생, 후배 등 ‘수호’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사진을 보고 편지를 읽고 시를 나누며 ‘수호’와의 추억을 공유하고 함께 아픔을 나눈다.
영화 속 생일 시퀀스는 그 자체로 한 판의 간절한 씻김 굿이었고 아름답지만 슬픈 진혼곡이었다. 메시지 전달에 연연하지 않았던 영화는 그저 함께 울어주면 된다고 말하는 듯 했다.
말기암에 걸려 국가 보상금을 받기로 한 뒤 다른 유가족의 전화를 받지 않는 사람, 옆집에 사는 ‘정남’의 지긋지긋한 오열 때문에 삼수 했다고 소리 지르며 문을 박차고 나가 버린 소녀. 이들의 자리에 나를 대입해보면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관객으로 하여금 객관적인 관찰자의 시점에서 벗어나 윤리적 고민을 하게 만드는 감독의 세심함이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이웃의 아픔을 끝까지 함께 나누는 옆집 여자의 따뜻한 배려와 ‘순남’이 이상하다는 말에 ‘그런 일을 겪고도 이상하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게 아니냐’고 오빠인 ‘정일’에게 되묻던 시누이의 말은 진정한 공감과 위로, 연대의 힘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었다.
그동안 소설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지만 감정의 밑바닥까지 닿지 못했다. 제대로 된 애도를 할 장소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생일 시퀀스를 보는 동안 비로소 나만의 애도작업을 할 수 있었다. 마음껏 울고 실컷 아파할 것을 허해준 영화 덕분이었다. ‘순남’ 과 ‘정일’ 의 마음속으로 건너가 등을 토닥여 주었을 뿐인데 치유와 위로를 받은 건 오히려 나였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생일모임 이후 순남과 정일은 비로소 아들을 떠나보낼 수 있었다.
기사 한 줄로 정리되는 사고와 남겨진 가족에 대한 또 다른 한 줄 기사는 삶이 가진 구체성을 대변하지 못한다. 영화는 304명의 개별성 중 겨우 하나에 카메라 렌즈를 맞추었울 뿐이다. 또 다른 이야기들이 계속 만들어져야 하는 이유다. 다루기 힘든 소재라는 이유로, 아직은 시기상조가 아니냐는 비판에 주저해서는 안 된다. 아우슈비츠의 비극, 세계 대전의 상흔을 기억하기 위해 지금도 여전히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누군가의 얘기를 듣는 다는 건 용기와 노력이 필요 할 뿐, 두려워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