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와 전기장판

by minmin


치이이이익-

순식간에 잠이 사라졌다. 미어캣처럼 고개를 번쩍 들어 놀란 눈으로 주변을 살핀다. 베란다 창이 검다. 벽 높은 곳에 걸려있는 시간을 확인했더니 새벽 4시 37분. 아직 한밤중이긴 한데, 참 애매한 시간이다. 한 시간만 일찍 깼어도 뭐라도 해보려고, 한 시간만 늦게 깼어도 하루를 일찍 시작하자며, 정신을 차렸을 텐데. 오늘은 날이 아니다 싶어 머리를 다시 베개 위로 떨군다. 영 편하지 않아 모로 누워 베개의 위치를 조정한다. 눈을 감고 있자니 티브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고 흰빛들이 눈 앞에서 아른거린다. 잠들기 전에 보았던 연예인들이 사라진 모양이다. 눈을 뜨고 리모컨을 집어 채널을 바꿔 다른 연예인으로 바통터치. ‘이제 너희들이 내가 자는 동안 이 집을 채워주어라.’ 다시 잠에 빠져든다.



이게 아침인가 싶을 정도로 뿌연 하늘이 가뜩이나 의욕 없는 나의 팔다리를 잡고 늘어진다. 햇볕이 쫙 주방까지 드는 날엔 그래도 청소가 하고 싶어지던데, 지금은 그냥 뜨끈뜨끈한 전기장판 위에서 뭉개고 싶다. 실컷 뭉개다가 누군가 차려주는 밥 먹고 다시 드러누워 못 봤던 드라마나 보고 싶지만, 이런 마음은 오래가지 못한다. 나랑 똑같은 포즈로 누워서 뭉개고 있던 오라가 일어나 어슬렁어슬렁, 자기 밥그릇이 비어있는 걸 보고, 나 한 번 보고, 외친다.


"야-옹- (밥 없어. 밥 줘.)"

"알았다, 이 팔자 늘어진 고양이야. 내가 바라던 팔자가 저기 있네, 저기 있어."


고양이의 언어는 매우 효율적이다. 한 단어로 모든 문장을 표현한다. 같이 오래 살아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그의 말을 꽤 정확하게 알아듣는 편이다. 신기한 건 저 녀석도 내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고양이는 요물이라더니 살쪄서 축 늘어진 뱃가죽을 끌고 다니는 저 둔한 놈한테도 해당되는 말인가보다. 깔고 자던 이불을 치우자 오라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전기장판 위에 홀랑 드러누워 버렸다. 청소기를 들어 먼지를 빨아들이는 걸 가만히 보고 있다가 전기장판 차례가 되어 나오라고 소리를 지르자 슬금슬금 일어나 소파 위로 올라간다. 청소기가 작은 방을 사라지니 다시 내려와 전기장판 위에 눕는다.


"거기가 니 자리냐? 고양이가 왜 이래."


오라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이미 눈은 감겨 있다. 밤새 자고 아침에도 자고 오후에도 자고, 종일 잠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저 팔자를 부러워할 수밖에.



"아니 또 샀어? 이런 건 어디서 그렇게 사는 거야? 집에 많잖아. 이게 다 몇 개야? 하나, 둘, 셋, 넷, 다섯. 또 어디 숨겨둔 건 아니겠지?"

"야, 쓰는 건 두 개밖에 없어. 다른 건 다 고장 난 거야."

"고장 났으면 좀 버리든가. 왜 이렇게 쌓아둬-"

"아이, 그럼 니가 버리든가- 사주지도 않으면서 잔소리는…"


아들놈이다. 이놈 새끼는 맨날 버리라고, 사지 말라고 잔소리만 한다. ‘널 버리지 않은 걸 다행인 줄 알아라.’ 한마디 해주려다가 괜한 오해를 할까 봐서 눈으로 레이저만 쏘아본다. 예전 같았으면 5초만 째려봐도 지레 겁을 먹고 꼬리를 내렸을 텐데 아들 나이도 마흔이 넘고 나니 씨알도 안 먹힌다. 그래도 눈치는 좀 늘어서 이제 피해야 할 뒤통수, 굽혀야 할 모가지 정도는 구분할 줄 아는 것 같다. 쏘아 본 지 10초가 되니 아들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헛기침을 하더니 오랜 만에 고기나 먹으러 가자고 한다. 고기란 말에 내 기분은 냉큼 옷을 갈아입는다.


"저-기 앞에 고깃집이 새로 생겼거든. 거기 맛있더라. 거기 가자!"



"여기 내 아들. 히히. 갈비 세 개 하고 공깃밥 두 개 먼저 줘요."

"아이고, 아들이 이렇게 커요? 하도 젊어 보여서 이렇게 큰 아들이 있는 줄 몰랐네." "젊긴 뭘 내가 벌써 칠십이 다 돼가는데. 히히. 얘는 마흔이 넘었어. 애 아빠야."

"아들도 그렇게 안 보이는데. 대학생인 줄 알았구먼. 집안 유전자가 좋네! 좋아."

"유전자는 무슨. 히히. 고기나 빨리 줘요. 배고파."

"아이고, 알았어요. 조금만 기다려. 금방 가져다줄게."


어릴 때부터 요런 맛에 애들 데리고 외식하러 다녔었다. 어딜 가나, 젊어 보여요, 애들을 참 잘 키웠네요, 이런 얘길 들으면 기분도 한결 나아지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 기특해지고 그랬다. 반대로 애들은 창피해한다.


"엄마, 자랑하려고 일부러 여기 왔지."

"아니야- 맛있어서 온 거지."

"아닌 것 같은데. 엄만 옛날부터 힘든 일 있으면 꼭 나나 미혜 데리고 외식하더라."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은, 아무 일도 없어."

"아닌데. 내가 아는데. 누가 힘들게 하는데, 지금."

"니가 제일 힘들게 해. 니가 맨날 왜 사냐, 안 쓰면 버려라, 잔소리하니깐 그러지."

"진짜야? 아니 그건 사실이잖아."

"니가 그래서 안 되는 거야. 사실이 뭐가 중요하니…"

"중요하지. 사실을 기반으로 이론을 쌓아야 무너지지 않는다고."

"이론은 개뿔, 지랄을 하네, 이과인 척하는 문과 주제에."

"아니 이과, 문과, 이런 건 또 어디서 주워들었어?"

"크크크, 유튜브"


민태는 꼭 잘 집는다. 뒷걸음질 치다 꼭 똥 밟는 아이다. 둔하다가도 진짜 아주 가끔은 저놈이 일부러 저러고 사나 싶을 때가 있다. 아들 말대로 무슨 일이 있긴 하다. 같은 조 민지숙이가 꼭 버스 운행이 끝나면 점검도 하고 세차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그냥 차고지에 처박아 둔다. 엔진오일 한 번 간 적 없고, 요소수도 맨날 내가 채워 놓는다. 한달을 지켜보다가 한 마디 했더니 그러더라.


"언니, 나 이런 못해. 전에도 남자 기사들이 다 해줬어. 이렇게 무거운 거 어떻게 들어-"


미친년, 지랄을 한다. 누구는 처음부터 다 할 줄 아나, 필요하니까 하는 거지. 그러면서 아니 칠십 먹은 할아버지한테 오빠, 오빠. 같은 회사 동료한테 오빠가 뭐야. 내가 저년을 어떻게 죽여놔야 하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이, 스트레스받아. 그래도 이 정도 일은 남 입으로 듣는 칭찬 한마디면 금세 잊을 수 있다. 길게 봤을 때 별일이 아니란 말이다. 육십 넘게 살면서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그런지 웬만한 일엔 꿈쩍 않는다. 그런데 가끔 한 번씩 옛날 일이 불쑥 생각나면 열이 확 오른다. 식은땀이 터져 나온다. 어제도 그랬다. 괴로운 기억은 어딜 가지 않더라. 혼자 조용히 있으면 더욱 현재와 과거를 오락가락한다. 티브이라도 틀어놔야 생각을 방해할 수 있다. 등이라도 따스워야 별생각 않고 잠들 수 있다. 저놈이 이런 걸 알 리가 있나. 티브이 고장 났다고 얘기한 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그동안 바빴다며 지금 고르고 있다고 하는데. 전기장판 고장 나서 홈쇼핑으로 샀더니 이런 거 홈쇼핑에서 사지 말라고 얘기하는 놈을 내가 진짜 상처 없이 키우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지 애비가 놀음에, 여자에 빠져 살았던 것도 모르게 하려고 얼마나 끙끙 대며 혼자 삭혔는지 이야기한 건 겨우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럼 알아서 받들어 모셔야 하는 것 아닌가. 자식새끼 키워봐야 진짜 쓸데없다. 그래도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게 저놈 때문이니 목숨만큼 소중한 건 변하지 않는다.


"엄마, 뭐해? 먹어-"

"그래, 먹자 이 시키야."

"크크크, 갑자기 욕은-"

"그럼 니가 내 새끼지 누구 새끼냐, 내 새끼한테 새끼라고 하는데 뭐가 이상해? 크크"

"하하, 알았어, 알았어, 먹자. 근데 이 집 고기 진짜 맛있다-"





한 번은 엄마가 하는 넋두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던 적이 있다. 엄마의 넋두리를 생각보다 합리적이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화만 내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행동을 아주 야무지게 따져 들었다. 충분히 화가 날 만한 상황이었다며 엄마 편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엄마는 생각보다 가슴 속에 화가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어떤 일이 있어서 화를 안고 사는 것인지. 엄마는 어떤 인생을 살았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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