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_2편.미동_"백만 년 걸릴 것 같은 일"

by 다정하게

무너진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다.

구씨는 말없이 술을 마셨고, 그렇게 매일 조금씩 말라갔다.

추앙하라는 미정의 말 이후, 그는 방 안 가득했던 소주병을 치웠다.

아주 작은 변화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오랫동안 멈춰 있던 삶이 조용히 움직인 순간이었다.


늘 술에 취해 있던 구씨가 방 안을 정리한다.
하루에도 몇 병씩 비워내던 소주병을 치우고, 쌓여 있던 쓰레기를 없앤다.
그리고 미정에게 조용히 말한다.

“백만 년 걸려도 못할 거 같은 걸 오늘 해치웠다.”

겨우내 골방에 갇혀 술만 마시며 살던 사람.

심하면 얼굴에 피가 말라붙은 채로 잠들기도 했던 구씨가
처음으로 손을 뻗어 ‘자신의 삶’을 움직이기 시작한 날이다.

변화는 혼자 만들어진 게 아니다.

그의 고요한 무력감 안으로, 염미정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미정의 “추앙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없이, 아무것도 묻지 않는 미정의 시선은 구씨로 하여금 자신을 다시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날, 치워진 소주병은 단순한 정리가 아니라 자신에게 내민 작고 조용한 구원의 손길이었다.

구씨는 말한다.

“자려고 하면 가운데 술병이 있는데,
그거 하나 저쪽에다 미는 게 귀찮아서 가운데 놓고
무슨 알 품는 것처럼 구부려서 자.
그거 하나 치우는 게 무슨 내 무덤에서 나와서 벌초해야 하는 것처럼 암담해.
누워서 소주병 보면 그래. ‘아, 인생 끝판에 왔구나. 다신 돌아갈 수 없겠구나.’
백만 년 걸려도 못할 거 같은 걸 오늘 해치웠다.”

아주 오래된 무력감과 포기의 자리에서, 처음으로 삶 쪽으로 밀어본 의지였다.
소주병 하나를 치우는 그 단순한 행위에, 그는 자기 고백처럼 감정을 실었다.
살기 위해, 혹은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기 위해, 그는 그날 한 번 움직였다.

그리고 그 말에 미정은 이렇게 대답한다.

“무슨 일 있었는지 안 물어.
어디서 어떻게 상처받고 이 동네로 와서 술만 마시는지 안 물어.
한글도 모르고 에이비씨도 모르는 인간이더라도 상관없어.
술마시지 말란 말도 안 해.
그리고 안 잡아. 내가 다 차면 끝.”

미정의 이 말은 ‘괜찮다’는 말보다 훨씬 강력한 수용이다.

그녀는 구씨를 바꾸려 들지 않고, 이해하려 들지도 않는다.
있는 그대로 둔 채로 곁에 서 있는 사람.
무엇도 요구하지 않고, 무엇도 붙잡지 않는 방식으로 그는 미정에게 ‘추앙받는 경험’을 한다.

그날 구씨는 소주병을 치웠고, 미정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관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말하지 않는 것, 기대하지 않는 것, 고치려 하지 않는 것.
그 모든 ‘하지 않음’이, 오히려 구씨를 움직이게 했다.

누군가는 별것 아닌 일이라 생각하겠지만,그에겐 살아 있는 쪽으로 몸을 기울이겠다는 첫 움직임이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나의 해방일지_1편.결핍_“허기를 안고 걷는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