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 마케팅과 빵덤 코리아
덕후의 전성시대
마침내 ‘덕후’가 환영받는 시대가 도래했다.
애초에는 사회성이 결여된 문제 인물로 인식되었던 덕후가,
이제는 자신의 관심분야에 열정을 쏟아부으며 스스로 행복을 추구하는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가진 매우 바람직한 시민으로 인식되면서
주변의 환대를 받고 있는 것이다.
덕후는 단순히 대상을 좋아하고 추종하는 ‘팬’과는 다른 개념이다.
깊이 있는 지식을 갖추고, 본인의 생활까지도 적극적으로 개조한다.
진정한 덕후는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 공부하고 고민하는 모습이 동반되는 것으로,
만약 게임 덕후라면 그 게임의 배경을 알아보고 책을 찾아보며
인문학적으로 기술적으로 탐닉하는 과정이 있어야만 제대로 된 덕후다.
게다가 이들은 그냥 단순히 좋아하는 팬심을 넘어
그 분야에 대해 연구를 하고 공유하는 즐거움을 통해 사회성까지 장착하는 양상이다.
때로는 직접 제품 생산에게까지 끼어들어 메이커에 한 마디 하게 만드는 오지랖까지 부린다.
사실 오지랖도 아니다.
이런 깊이 있는 소비자들의 진정한 충고를 받는 메이커는
다시 한번 제대로 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니,
서로 동반자의 관계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메이커가 만들고 소비자가 사용하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같이 키워나가는 파트너인 셈이다.
그래서 통상 덕후가 만들어지는 영역은 게임이나 프라모델, 레고 등
오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일정 반열에 오를 수 있고,
역량의 레벨이 존재해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한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그 영역은 조금씩 확장되어 왔다.
내 방에서 365일 가능한 그런 활동 말고도,
시간이 날 때 어디론가 떠나서 활동하는 오토바이 라이딩, 스쿠버 다이빙,
산악자전거 같은 매니아적인 취미 활동도 슬슬 덕후 세계에 들어오고 있다.
초기 투자 비용으로 인한 진입 장벽이 어느 정도 발생하고,
입문 이후에도 꾸준히 시간 투자가 필요한 것이 특징이라고나 할까.
스타를 좋아하더라도 그냥 혼자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BTS의 ‘아미’처럼 하나의 유기적인 조직이 되어 스타와 상호작용을 하고
그들의 콘서트나 음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에는 진정한 덕후로 인정받을 수 있겠다.
일상 가벼운 종목에서도 등장하는데 이를 테면 힙 플레이스 덕후도 있다.
저녁이나 주말, 시간 나는 틈틈이 가장 핫하고 트렌디한
카페나 베이커리, 펍 같은 곳을 돌면서 시간을 보내고,
자신의 소셜 계정에 글과 사진을 올려서 많은 사람들의 팔로우를 받는다.
본인은 이왕 보내는 시간, 핫한 공간에서 즐겁게 시간을 보낸다는 만족감이 있고,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는 뿌듯함이 있다.
게다가 자신의 취향적 평가가 그 공간의 주인장에게 피드백을 주는 효과도 있으니,
보람도 없지 않을 터.
코로나전에 유행했던(아!) 영화 ‘N차 관람’ 현상도 비슷한 맥락이다.
예술 영화건, 상업 영화건 상관없다.
그냥 내 취향에 맞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면 집착하고 행동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내용을 공유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준다.
아마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본격적으로 대중적 이슈가 되었던 것 같다.
Bohemian Rhapsody | Official Trailer [HD] | 20th Century FOX - YouTube
처음에는 대체적인 줄거리를 파악하고,
두 번째에는 연기 중심으로,
세 번째는 미술 중심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시 전반적인 흐름을 보면서 마무리.
이런 분들 많이 생기면 영화감독 입장에서는 한없이 고마우면서도 두렵겠다.
너무 구석구석을 파고 들어서
보통이라면 들통나지 않을 꽁꽁 숨겨진 약점을 들키게 되지나 않나 하고.
아마 다음 작품에서는 더더욱 디테일에 신경을 쓸 수도 있다.
어느 장면 하나 대충 넘어가지 않고 매 장면마다 최선을 다 하게 될 테니,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땡큐.
다음 작품도 기대하게 되고, 실제로 더 높은 퀄리티의 작품을 볼 수 있을 터이다.
선순환.
덕후는 소비자라기보다 파트너
이들은 어찌 보면 마케팅의 대상자는 아니다.
오히려, 브랜드와 동등한 레벨이고, 아군일 수도 적군일 수도 있다.
환심을 사려는 작은 아부들이 아니라,
그들이 좋아하는 우리 브랜드의 본질을 계속 지켜나가려는 노력만이
길게 그들을 지원군으로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되겠다.
든든한 지원군으로서 덕후의 역할이 여실히 드러나는 사례가 있으니
바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폴라로이드’의 경우다.
폴라로이드는 성장하는 디지털카메라 시장에 밀려
2007년에 카메라 생산 중단을 결정하고,
2008년에는 필름을 단종하고 공장 폐쇄 결정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2009년에 극적인 일이 발생했다.
폴라로이드가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임파서블 프로젝트(Impossible project)’를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투자자를 모으고 공장을 임차해 필름 생산 라인을 재개했다.
비록 카메라는 생산 중단되었지만
이미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가진 사람들이 계속 찍을 수 있도록
인스턴트 필름은 계속 생산해 내기 위해서.
그리고 레이디 가가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하고
그녀와 합작한 특별 라인(specialty line)을 2011년 CES에서 발표했다.
그 결과는,
마침 트렌드 중 하나였던 아날로그 문화에 대한 향수와도 맞물리면서 성공적이었다.
2014년에는 마침내 100만 필름 팩을 판매했고, 2천만 명의 사용자를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이후에는 페이스북 팬 커뮤니티를 적극 활용해
PX100, PX600 등 신제품 카메라 생산에 까지 이르렀다고 하니,
덕후들의 팬심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그 끝을 보여준 사례가 아닐 수 없다.
https://us.polaroid.com/products/color-600-instant-film?quantity=1
(여전히 판매되고 있는 폴라로이드 필름 / 사진 출처 : 폴라로이드 홈페이지)
여행은 덕질의 연장
그냥 ‘보러’ 가는 여행은 의미가 없다.
멋지게 사진을 찍어봐야 남들이 이미 찍은 것들과 다를 것도 없다.
‘하러’ 가야 한다
그것도 내가 잘하는 것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최상의 환경을 골라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직접 하고, 같이 있는 사람들과 소속감을 느끼고,
내가 다녀온 경험과 정보가 다른 모르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일련의 과정을 즐긴다.
같이 산악자전거나 오토바이 라이딩을 가고,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과 같은 배를 타고 스킨 스쿠버를 하고,
또 저녁 시간에는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과 진솔하고 따뜻한 시간을 가진다.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은 쉽게 친해진다.
그리고, 굳이 나중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지 않더라도 다시 만날 가능성이 그냥 남들보다는 많다.
오프라인 모임뿐이 아니다.
온라인 상에도 꽤나 큰 응집력을 가진 모임이 있게 마련이고,
내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더라도 그냥 눈으로라도 즐긴다.
사실 어떻게 보면 마치 종교 집회와 같은 성스러운 행위 같기도 하다
영혼을 다해 좋아하고 따르는 하나의 대상이 있고,
그분을 찬양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를 찾아,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경건하지만 유쾌하게 함께 한다.
예배 대신 스포츠나 여가 활동이 있을 뿐이다.
그 장소는 이 취미를 가진 앞선 사람들의 발자취가 만들어낸 곳이며,
그곳을 찾은 많은 익명의 무리들과 하나의 무리로 마음 편하게 만나는 곳이다.
그리고, 정말 마음에 든다면 정기적으로 다시 찾으며 영혼의 안식을 얻게 된다.
N차 여행 이미 예약 완료.
할렐루야. 나무아미타불. 앗살람 알라이쿰.
빵덤 코리아, 한국 사람들은 왜 이리 빵을 좋아하나
빵은 판타지다.
색은 흰색, 갈색, 빨간색 등 유치한 총천연색이고, 향은 고소하다.
촉감은 부드럽고 맛은 달다. 짜거나 맵거나 시거나 한 어른스러운 맛은 없다.
유아스러운 단 맛 일색이다. 달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달짝지근하다.
보들보들한 그 촉감은 대체 불가하다.
그리고, 함께 배합하는 종류에 따라 무궁무진한 종류가 있고,
만들고 굽는 방식에 따라서도 어마 무시하게 다양하다.
남자보다는 압도적으로 여자들이 빵을 좋아한다.
시각, 촉각, 미각 모두 민감한 사람일수록
빵을 좋아한다라는 말도
일리가 있는 듯하다
주변에도 빵순이들이 많다. 빵을 먹을 때면 참 행복해 보인다.
그들은 가 봐야 할 인생 빵집을 한 두 군데쯤은 가지고 있다.
식빵은 어디, 그 외 빵은 어디하고 나름 취향도 매우 확고하다.
사실 해외 빵 가게에 가 보면 그 종류의 다양성 면에서 한국만한 곳이 없다.
세계에 이른바 ‘빵 성지’라고 불려지는 곳은 꽤 있다.
뉴욕, 샌프란시스코, 파리, 싱가포르, 타이베이 등.
하지만 이 곳의 빵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빵과는 좀 다르다.
바게트나 호밀 빵처럼 대 놓고 일상적인 식사용 빵이거나 아니면
마카롱처럼 대놓고 디저트 용으로 달디단 것으로 양분화되어서,
우리나라처럼 식사용이면서 다양성을 주는 빵이 아니다.
빵을 주로 먹는 나라에서는 빵은 다른 음식들과 곁들여 먹는 기본 요리다.
우리로 치면 밥이니, 많은 변주가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밀가루를 활용한 것일 뿐 빵이라고는 할 수 없는 디저트 빵 종류들이 있다.
비현실적으로 풍성하고 달고 화려한 디저트 빵들.
그리고 세계의 빵 성지로 유명한 곳의 빵은 바로 이런 디저트 빵 종류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빵은 식사이건 간식이건 하나의 별도 요리다.
일상 빵처럼 너무 평범하지도 않고, 디저트 빵처럼 너무 자극적이지도 않다.
건강을 생각한 빵도 많고, 단 맛의 강도에 따른 변주도 다양하다.
동서양의 재료를 융합하는 새로운 실험도 계속된다
그러다 보니, 기본 빵들의 종류가 원체 다양하다.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파는 비교적 정형화된 종류를 넘어서서,
독특함으로 승부하는 소문난 동네 빵집들의 몇 개 대표 아이템들은
이미 동네 단위를 넘어서 전국 단위로 알려진 곳들이 적지 않다.
아니, 적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지방 권역 별로 리스트업이 가능할 정도로 많다.
빵권 지방 자치시대
그래서인가.
몇 년 전부터 개인 단위로, 혹은 관련 업체가 조직적으로 관여해서
‘대한민국 빵 지도’라는 것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도시 단위로 보면 서울, 부산, 대전, 제주는 이미 정평이 난 곳들이었고,
경기도와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도 이에 질세라 지방 단위의 특색을 띠면서
저마다의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다.
관광 측면에서 보면, 강원도, 제주도, 부산은 원래 여행객이 많이 찾는 곳이라,
간 김에 여행 루트 중 하나로 들르기 좋은 곳이라는 이점을 갖고 있는 셈이지만,
경기도, 충청도 지역의 유명 빵집은 서울에서 한두 시간 거리이니
그 빵을 맛보기 위해 정기적으로 들르고,
간 김에 다른 구경도 하게 되는 유인 효과를 거둘 수 있으니,
그 지방 관광에 톡톡한 효자 역할을 하는 셈이다.
제주도 역시 반복 방문을 유도하기 위해 다양한 관광 자원 콘텐츠를 정비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빵집은 매우 좋은 소재가 아닐 수 없다.
제주도에서 나오는 유기농 소재를 활용해 만든 건강하고 맛있는 빵과 음료에
좋은 경관까지 묶어서, 게다가 지역별 클러스터로 방문이 가능하니,
빵에서 빵으로 이어지는 평화롭고 여유로운 일상을 그리는 빵 덕후들에게
다시없는 좋은 관광지인 셈이다.
(전국 빵지도)
제주도에서 나는 유기농 당근으로 만든 빵에,
제주도 감귤로 만든 주스를 마시며 평화로운 제주 바다를 바라보는 호사를 곳곳에서 누릴 수 있다.
특별히 힘들여 유명 관광지를 찾아갈 마음의 여유도 없다면,
그냥 빵 로드를 따라 천천히 움직여도 좋을 것이다.
끝나고 나면, 적어도 내가 제주도에서 이거 한 가지는 다 이루었도다 하는 뿌듯함이 남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