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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씨 Jan 17. 2021

젠지 아들의 뒤통수

타겟 소비자의 뒷모습에서 배운 것들

작년 연말에 패션 브랜드 캠페인 업무를 하나 맡았다. 

해외 브랜드를 라이선스 해서 국내에서 제조, 판매하는 캐주얼 브랜드였다. 


캐주얼 패션의 핵심 타겟은 단연 20대 초반이다. 

그들은 10대의 워너비이고, 30대의 패션 뮤즈들이다.

20년 전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리고, 현재 20대 초반은 밀레니얼 세대도 아니고 그다음 세대인 Z 제너레이션, 즉 젠지다. 


그러니,

이번 프로젝트의 핵심 타겟은 20대 초반, 

패션에 관심 많은 남녀 대학생이라는 이야기.


시간과 비용 문제로, 정식 조사를 꺼리던 담당 영업팀에서는 

사내 혹은 외부에라도 쉽게 부를 만한 지인이 없을지? 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물론, 우리 아이들을 처음부터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침 대학생 아들, 딸을 둔 나로서는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심정으로

아 어떻게든 이 아이들을 꼬드겨서 친구들까지 불러 모아 봐야겠군 하고

어느새 나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젠지에 대해 떠도는 책이나 기사 같은 2차 자료들이야 사실 차고 넘치지만, 

그래도 막상 사람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누면서 받게 되는 영감은 

그런 것과 비길 수가 없음을 경험으로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집에 가서 저녁을 먹으면서 아이들과 일차 교섭에 나섰다. 

둘 다 뜨악한 표정들이다.

뭐?

엄마 회사에 가서, 엄마 회사 사람들한테 자기 패션 얘기를 하는 거라고?

안 해!


그나마 아들은 조금 여지를 보였지만, 딸아이는 철옹성이었다. 

사실 패션 동아리를 하는 등, 평소 패션에 훨씬 관심이 많아 보이던 것은 딸 쪽이라 

은근 기대가 컸는데, 절대 엄마 회사에는 올 수 없다고 펄쩍 뛰었다.

그래서 겨우 친구들에게 설문지를 받아 주는 걸로 얘기가 되었다.

그나마도 온라인 커피 상품권 정도는 챙겨줘야 한다고 눈을 부릅뜬다.

예, 예.

섭외만 해 주십시오.


이번에는 그래도 조금 여지를 보이는 아들. 

구석으로 슬쩍 불러 용돈 **원을 제안한다.

급 따뜻해지는 눈빛.

그리고 바로 오케이.


가장 빠른 일정을 잡고, 친구도 불러오라고 신신당부했지만

당일에 달랑 혼자 회사 앞으로 왔다.

시간이 맞는 친구가 없다나 뭐래나.

그래도 온 게 고마워서 얼른 회의실에 앉히고, 

미리 짜 둔 설문지로 팀원들이 질문을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되도록 아들과 떨어져
저기 멀리 앉아서 아들의 뒤통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불편할 까 봐, 혹은 가족의 존재에 대한 부담감으로 솔직한 이야기를 못 할 까 봐.


하지만 웬걸. 막상 질문을 시작하자, 이 녀석이 막힘없이 술술 자기 얘기를 잘도 한다.

평소에 공부는 안 하고 패션 유튜브만 열심히 보는 녀석처럼 아는 것도 많다.

별로 할 말이 없어서 빨리 끝나지 않을까 하던 걱정도 잠시. 

이 사람 저 사람 질문이 쏟아지고, 대화는 거의 한 시간이 넘게 진행이 되었다.


집에서 보던 그 덜 떨어진 녀석이 맞았나 싶게, 

엄연한 젠지 소비자로서 자기의 평소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배우는 게 많았다. 

그냥 집에서 대충 겉모양과 행동을 봤을 때와, 

이렇게 전문적인 설문을 가지고 본격 소비자 탐침을 시도한 거랑은 확실히 차이가 난다. 


글로 읽은 젠지, 거죽만 본 젠지와는 또 다른 깨달음을 주는 거다.


사실 그랬다.

영국에 가서 좌담회 조사를 할 때도, 

그 뒤 관찰실에 앉아서 참석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깨닫는 바가 참 많았다.

중국에 가서 초호화판 좌담회 관찰실에서도,

내가 평소에 주변 현지인에게서 듣던 것과는 다른 새로운 부분을 많이 알게 되었다.


타겟 소비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론 자료도 많이 봐야 하고 정량 설문조사로 큰 그림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 궁금한 부분에 대해 

그들이 어떤 단어로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직접 보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좌담회 비용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피치 못하게 정식 조사를 생략하게 되더라도

최소한 주변 사람들을 불러서라도 직접 묻고, 들어봐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발상도 생기고,

내 방향에 자신감도 생기고,

광고주 앞에 갔을 때 즐겁게 공유할 에피소드도 생긴다.


우리 일이란 게 어차피

사람을 연구하는 

인간학 아닌가.



p.s. 

품앗이로 몇 명의 이야기와 더 많은 설문조사 결과를 받아 

최종 인사이트를 정리했고, 

제작 방향도 잘 풀려서, 

첫 번째 제안에 바로 잘 통과되었다는 후문

가족이 있건 말건 솔직하게 평소 생각을 말하는 우리 집 젠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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