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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씨 Jan 31. 2021

40세, 존버 하다가 좀비 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새로운 시작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보면, 

아, 그때가 내 인생의 변곡점이었군. 

할 때가 있다.


내 커리어에서는 아마 그게 대략 40세였던 것 같다. 

15년의 경력을 쌓은 후, 디렉터 내지는 팀장이 되어 자기 이름을 걸고 일을 시작하는 시기였다.

여기저기 헤드헌터라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오기 시작했고, 

다른 회사로 이직한 선배, 동료가 연락을 하기도 했다.


같은 광고회사에서 오는 연락은 사실 고려도 하지 않았다. 

굳이 조직이나 사람 문제도 없는데 회사를 바꾸면서까지 같은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예 다른 영역으로 갈 바가 아니라면.


그런데, 그때 연락 온 회사들 중에서 

‘아, 그거 좀 제대로 고민해 볼 걸’하는 생각이 뒤늦게 드는 곳이 두 군데 있다. 

XX 홈쇼핑 기획 부서와 YY 텔레콤 빅데이터 부서였다. 


당시 생각은 그랬다.

홈쇼핑의 경우, 우아하게 광고회사에서 브랜딩하고 컨셉 뽑다가, 

바로 세일즈 현장에 가서 제대로 일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고, 

무엇보다 홈쇼핑이라는 것이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그다지 미래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만약 그때 홈쇼핑으로 옮겨서 일을 제대로 익혔더라면, 

지금 가장 핫한 이커머스나, 라이브 쇼핑이나 퍼포먼스 마케팅과 같은 영역으로 연결되어,

지금보다 더 활기차게 일할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홈쇼핑이라는 작은 나무만 봐서,
소매업이라는 큰 사업 영역에서 경험을 쌓을 기회를 포기했던 셈이다.


텔레콤의 경우는, 쌓인 소비자 구매 데이터를 가지고 신사업을 구상하는 일이었다.

이 역시 당연히 내가 익숙한 일이 아니라는 부담감에 더해, 

빅 데이터라는 개념도 아직 생소할 때라 비전도 없어 보였다.

헤드헌터는 미래형 산업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게 말했지만, 내 귀에는 너무 모호하게 들렸다.

그리고, 이 산업은 지금 가장 핫한 빅데이터 플랫폼 사업으로 성장했다.


일단, 인정할 것. 

산업을 크게 보는 눈이 부족했다.

결국, 업계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안정 추구형 존버 정신이 문제였다.

15년 동안 고생해서 이제 좀 할 만한데,
다시 낯선 곳으로 가서 새로 시작한다고? 

하는 본전 생각에, 새로운 생각을 해 볼 가능성을 아예 막아 버렸다.


사실, 우리 일에서 이제 좀 할 만한데?라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데 말이다.

그 뒤 10년 동안 업계에서 요구하는 역량은 디지털, BTL 등 끊임없이 추가가 되었고, 

어차피 그때까지 배운 기술로 계속 버틴다고 버텨지는 바닥도 아니었다.


그래, 그게 가장 큰 착각이 아닌가 싶다.

존버라고 하지만, 절대 그 자리에 버티고 있을 수는 없다.

버티자고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이미 뒤처지기 시작한다.


존버는 다른 기회가 전혀 없을 때 켜야 하는 마지막 생존 모드이지,

다른 선택의 기회가 있을 때 발휘해야 할 정신은 아닌 것 같다.


40세,

그때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뭐라도 시작할 수 있는 젊은 나이였는데 말이다.


100세까지 사신 분의 에세이를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중에서 압권이 이 이야기다.

70대에 상처하고 혼자되셔서, 다들 재혼을 권했지만 

내가 이 나이에 뭘~ 하고 끝내 사양했는데

그 뒤로도 30년 가까이를 더 살았다고.

이럴 거면 그냥 재혼할 걸 그랬다고.


지금 내 나이도 아마 지나고 보면 그런 나이가 아닐까 한다.

절대 존버 하지는 말자.

10년 전을 반면교사 삼아.

타이밍을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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