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펜은 기록도 수정도 선명하다.
틀린 자리를 수정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잘못 쓴 글씨를 어떤 글씨인지 알아보지 못하게 마구 헝클어 놓는 것이다.
이 방법은 꼭 파마한 머리카락을 뭉쳐 놓은 것 같아 썩 보기 좋진 않다.
그나마 깔끔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수정액이나 수정테이프다. 하지만 그마저도 흔적이 너무도 저명하게 남는다.
마치 ‘여긴 틀린 글씨를 수정한 자리’라고 표지판을 세워 둔 것 같다.
수정테이프를 긁어, 수정하기 전 글자를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들 때도 있다.
그런 이유로 볼펜을 손에 쥐고 있으면 절대 실수하면 안 될 것 같은 면접관을 마주한 기분이 든다.
반면 연필은 그 흔적을 지우개로 지울 수 있다.
희미하게 남아 있을 수도 있지만, 어지간하면 말끔하게 지울 수 있다.
(이 부분은 어쩌면 지우개가 더 중요할 수도 있겠다.)
연필의 매력적인 요소는 연필만으로 농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연필 끝을 길게 빼어 깎고 연필심을 날렵하게 다듬은 후 종이에 살짝 얹는다.
그런 다음 손끝이 아닌 손목에 최소한의 힘만 주어 움직이면 종이 위에 연필이 옅게 묻어난다.
힘을 뺀 손과 달리 정신은 온전히 집중해야 한다.
균일하고 일정하게 움직여야 매끄럽고 고른 결과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빈 곳이 보이면 다시 살짝 지나가 주면 거의 완벽하다.
진하게 하고 싶다면 연필을 쥔 엄지손가락에 힘을 주고 연필을 종이에 대고 밀듯이 그어 주면 된다.
이렇게 농도를 조절해 선을 긋다 보면 연필 하나만으로도 멋진 풍경화 한 점을 그릴 수도 있다.
연필의 또 다른 매력은 소리다.
연필이 종이를 스칠 때 나는 소리는 어딘가 모르게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각사각’이라는 표현과는 조금 다르다.
‘스윽슥슥’에 가깝다.
그마저도 도화지, 수채화지, 캔버스 위를 지나는 소리가 모두 다르다.
(모두 다른 매력이 있으니 들어 보길 추천한다.)
이러한 이유들로 나는 연필을 더 좋아한다.
하지만 일상에서는 볼펜을 써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당장 내 필통만 봐도 볼펜이 들어 있고,
외출할 때 챙기는 필기구도 항상 볼펜이 먼저다.
연필을 써야 할 때와 볼펜을 써야 할 때는 다르다.
만약 두 경우를 바꿔 써야 한다면 어떨까.
상상만으로도 불안해진다.
사인해야 할 서류에 볼펜이 없어 연필로 적는다면.
문제집을 볼펜으로 푼다면.
경조사 봉투에 연필로 이름을 적는다면.
그렇다고 해서 안 될 건 없지만,
어딘가 어색하고 불안한 건 사실이다.
그림도 연필로, 숙제도 연필로, 편지도 연필로 쓰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당연히 연필을 써야 했다.
틀리면 언제든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써도 되던 때,
그때는 오히려 여러 종류의 볼펜을 갖는 게 로망이었다.
지워지지 않는 볼펜처럼 실수도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 자리에서, 우리는 대부분 희미함보다 선명함을 요구받는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자리가 많아지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수많은 종류의 펜들이 나오지만,
나는 오래도록 연필을 좋아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