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모난 돌의 성장기.
사실 내가 다니는 대학교는 내가 원해서 지원한 대학교가 아니었다.
다른 대학교에 지원했었고, 합격했었지만 타지에 가면 고생한다는 부모님의 말과 등록금 지원이 불가하다는 말에 장학금을 받고 집 근처 대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과도 내가 전혀 관심 없는 과로 들어갔기 때문에, 흥미를 붙여보려 해도 된통 어려운 말들 뿐.
원하지 않는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내 삶은 이미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점점 더 내 삶에 대한 결정권을 잃어갔다고 느꼈다.
과 대표가 되는 일은 어렵지 않았었다.
20대 초, CC로 만난 오빠가 회사에 취업한 후 바람이 났다.
같은 동기 -심지어 여자친구도 있는 분-가 여자를 소개해 주었단다.
바람이 들켰던 그날은 그 사람의 휴대폰을 꼭 보고 싶었다. 당시 스마트폰이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절이어서, 안드로이드 오버클럭에 빠져있었던 우리 둘은 오버클럭 정보를 보고 싶다는 핑계 삼아 그 사람의 휴대폰을 탐색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알 수 없는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심증만 갖고 있는 상태로 물어볼 순 없으니, 그 사람의 휴대폰 화면을 끄려던 찰나에 온 메시지.
"잘 들어가셨어요?"
그 사람인척 하고 대화 몇 마디를 나눠본 결과, 여자친구가 있는 걸 모르는 눈치이다.
여자친구인걸 밝히고 얘기를 드렸고 그 여자분은 정말 죄송하다고, 몰랐다며 연락을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미 물증까지 확보한 나는 그 사람을 추궁하였고, 그 사람은 무릎까지 꿇고 우리 집 앞에서 몇 날 며칠을 기다렸지만 나는 헤어짐을 택했었다.
갑자기 떠나고 싶었다.
경기도권에 사촌언니가 마침 독립했었어서, 오랜만에 사촌언니랑 놀 겸 떠나고 싶어 서울로 상경하게 된다.
이 날 이후로, 나는 서울에 정착하게 되었다. 온갖 문화의 냄새와 편리한 교통,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신없는 하루가 지나가있었다.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다.
홍대와 명동이 너무 궁금했었던 나는, 홍대에서 명동까지 걸어 다녔다가 온 다리에 알이 배겨 이틀 정도 이불에서 나오지 못했던 적도 있었다.
정신없는 나날들이 진정될 무렵, 내일로 여행을 혼자 떠나기도 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순천만 정원에서 한없이 펼쳐져 있는 습지를 바라봤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그때의 순간은 내 인생에서 아무 걱정 근심 없는 가장 평화로운 날 중 하나였다.
슬슬 독립을 해야 해서, 취직한 회사 내 다른 직원의 도움을 받아 운이 좋게 저렴한 서울대입구에서 자취를 시작하게 되었다.
500/30, 원룸이었지만 역과도 도보 10분이었고 가는 길에 시장과 회사가 모두 있어 난 정말 편하게 지냈었다.
그때뿐이었다.
알 수 없는 우울감과 확연히 줄어든 말 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밥도 잘 먹지 않았고, 매일 악몽의 미끄럼틀에서 허우적대다 깨는 날이 반복되었다.
내 악몽은 소름이 끼칠 만큼 무섭고 억압받는 느낌만이 전부였다.
내 집을 들어오려는 알 수 없는 존재와 창문밖에서 큰 두 눈알을 좌우로 굴리며 누군가를 찾으려는 존재들.
어떤 귀신이 현관문 위쪽에서부터 뱀처럼 손을 넣어 들어오려다가 노란색 한복을 입은 할아버지가 'XXX 년아! 어딜 들어오려 해! 나가!'라는 소리에 귀신이 도망간 꿈도 꾼 적이 있었다.
지금에서야 부모님과 얘기했을 때는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지켜준 게 아닌가 싶단다.
외할아버지가 노란색 한복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우울감은 내 일상을 서서히 잠식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다시 눈을 감을 때까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먹구름 같은 존재였다. 웃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고, 결국에는 그냥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눈을 뜨고 있는 낮에는 매일 울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악몽을 하도 꾸니, 귀신으로부터 주인을 지켜준다는 영물인 고양이도 데려 왔었다.
고양이 한 마리를 데려오니 그 아이가 외로울까 봐 한 마리 더 입양했다.
고양이를 키운 뒤로는, 고양이가 사고 치는 것을 처리하고 밥 주고 놀아주느라 체력이 소진되어 꿀잠 아닌 꿀잠을 자게 되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우울감은 가시지 않았었고, 고향에 잠시 내려갔다 온 날에는 더 미친 우울감이 찾아왔었다.
술도 매일 마셨었다. 담배를 피울 줄 모르던 나는 이런 우울감을 달랠 방법으로 술을 찾았었고, 매일 소주 반 병씩 마셨었다.
무언가 내 안에서 고장 난 것 같아, 어느 날은 정신과를 찾았다.
여러 장의 우울증 테스트지를 거친 나는 우울증-그것도 중, 고위험도- 판정과 함께 약을 처방받게 된다.
이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얼떨떨했다.
병원을 나오고 나서, 둘째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바로 말을 했다.
"나, 우울증이래"
둘째 동생도 갑작스러운 나의 말에 당황하여 맞지도 않는 육하원칙으로 나에게 반문하였다.
"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는 다행히 물어보지 않았었다.)
약물치료와 함께 잠도 제대로 못 자게 된 나는 수면유도제까지 처방받았었고, 그때쯤부터 마음의 병과 함께 몸에서도 실질적인 아픔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프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보니 운동과 스트레칭을 너무 하지 않아 척추 기립근이 약해져 허리디스크 초기 증상이 보인다고 했다.
척추 기립근에 근육주사를 몇 대 맞고, 재활치료를 해야 했던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회사에 병가를 1달 신청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하였다. 내가 일부러 쉬고 싶어 없는 병도 지어내서 쉰다고.
다행히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소문을 퍼트린 사람에게 왜 그러셨냐고(마치 달콤한 인생의 이병헌처럼) 얘기를 나눈 끝에 사과를 받아내고 병가가 시작되었다.
이미 마음의 병이 나를 온전히 잠식한 뒤라, 스트레칭의 '스'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매일 술과 점점 증상이 심해지는 자살시도가 시작되었다.
또다시 고향에 내려가게 될 일이 있어, 부모님에게 애써 숨기며 밝은 척을 하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날.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엄마에게 말했다.
"나, 우울증이래. 그래서 약 먹고 치료하고 있어. 별 거 아니야."
엄마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터트리셨다. 하지만 현실은 기차시간이 다가오고 있어 나를 바래다주었어야 했다.
그 순간까지 사실을 모르던 아빠는 나를 기차역에 배웅하고 나서야, 엄마로부터 사실을 전해 듣고 나에게 전화를 하였다.
"힘들면 내려와서 엄마아빠랑 푹 쉬자."
나는 여전히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우울증과 싸우는 나날들 속에서, 나를 어디로 데려가게 될지 모르는 불확실함이 더 커져만 갔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나는 길을 찾기 위해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