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모난 돌의 성장기.
우울증은 계속해서 심각해졌지만, 정말 웃기게도 집에 내려가기 싫었었다.
집에 내려가면 포근히 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과 반대로 또다시 부모님이 언제 싸울지, 우울증인 나에게 화를 내실지 아무런 예측도 할 수 없고 늘 긴장상태의 집안 분위기를 마주하기 싫었다.
무엇보다, 지방에서 살던 나에게 수도권이 주는 문화, 교통, 직업적인 혜택은 어마어마해서 그 지독한 우울증에도 내려가기 싫었었다.
하루는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취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를 사랑해?"
"그럼, 내 자식인데 당연히 사랑하지"
울부짖으며 엄마에게 물었었고, 엄마는 몇 마디의 말을 더 했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후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내 삶과의 안녕을 마주하는 시도를 했었다.
하루는 남아있는 수면 유도제를 모두 먹은 뒤, 정신이 끊겼었고 침대 위에서 눈을 떴었다.
손가락을 움직이고 싶었지만, 움직이는 건 내 눈알뿐.
지구의 중력이 마치 내 침대 밑에 바로 있는 것처럼 내 몸은 하염없이 침대 밑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꼈었다.
정신을 차린 건 3시가 다 지나간 시간 무렵, 드디어 몸을 일으킬 수 있었고 그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축 쳐지는 기분과 함께 다시 잠을 자러 갔었다.
그때쯤부터 사물, 사람, 내 생각의 이름 등 모든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었고 말도 더듬더듬하기 시작했었다. 어느 때는 문을 열 때마다 ‘문’이라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나는 다시 포스트잇을 붙여놓았다. 냉장고, 책상, 커튼—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을 계속 확인하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대화 중에도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말이 더듬거리거나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병원에서는 '인지장애'가 시작되었다고 했었다. 심각한 단계는 아니지만, 그래도 당분간 단어나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집 안에 있는 냉장고, 컴퓨터와 같은 이름이 없는 사물들에 포스트잇으로 이름을 써서 붙여 두었다.
중간중간 부모님과 전화를 할 때는 포스트잇의 이름을 보며 '티비 봤어, 냉장고에서 뭐 꺼내서 먹었어'라는 식으로 내가 건강하게 생존해 있음을 거짓으로 알렸다.
당시에는 나 스스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나는 삶의 끈과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문뜩 들었고, 네이버에서 우울증, 조울증과 같은 마음의 병이 있는 사람들의 카페에 가입하게 된다.
우선 집 밖을 나서는 것부터 시작해서 오피스텔 한 바퀴, 동네 한 바퀴, 지하철로 이동해 보기.
갓난아이가 마치 걸음마를 시작하듯 다시 세상 밖에 나오기 시작했다.
이때쯤 나의 인생 명작 '에반게리온'을 만나게 된다.
애니에 대해 지대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었지만, 에반게리온은 나에게 있어 더욱더 그 시기에 특별한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만나게 된다'라고 적었다.
내가 세상에 대해, 어릴 적 나의 시절에 대해 마주하는 시간 속 아픔이 있던 것처럼 주인공 역시 이런 시기를 겪게 된다.
‘에반게리온’을 보면서 주인공이 겪는 고통과 성장의 과정을 보며, 내 자신의 감정과 고통이 조금은 이해되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You can (not) redo’라는 문구는 나에게 반복되는 고통 속에서도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었다. 그 애니메이션의 OST를 들으며 내 감정이 안정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