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편. 남기지 않기로 한 것들

by 모온


기준이 바뀐 뒤
내가 가장 많이 연습하게 된 건
무언가를 하지 않는 선택들이었다.


예전의 나는
하루를 매끄럽게 넘기기 위해
항상 무언가를 더 했다.
설명했고,
이해했고,
괜찮은 척했고,
관계를 정리했고,
불편함을 빠르게 처리했다.


그 모든 행동들은
능동적으로 보였지만
사실은
하루를 견디기 위한 자동 반응에 가까웠다.


기준이 바뀌고 나서
그 자동 반응들이
하나씩 걸리기 시작했다.


그날은
아침부터
마음이 어딘가에 걸려 있었다.
분명히 큰일은 없었고,
해야 할 일들은 평소처럼 진행됐다.
그런데 하루의 중간중간에서
자꾸만 멈칫하게 됐다.


불편했다.
하지만
왜 불편한지
굳이 캐묻고 싶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원인을 찾았을 것이다.
누군가의 말 때문인지,
내 컨디션 때문인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그날은
불편함을
바로 없애지 않기로 했다.


이유를 붙이지도 않았고,
해결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다.
그 감각이
사라지지 않은 채로
하루를 따라다니게 두었다.


불편함을 안고 있는 상태는
생각보다 불안했다.
이렇게 두면
내가 게을러지는 것 같았고,
상황을 방치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다.
불편함은
내가 급하게 처리하려 할수록
더 나를 잠식했고,
그대로 두었을 때는
오히려
힘을 쓰지 못했다.


그날의 불편함은
끝내 사라지지 않았지만,
하루를 끌고 가지도 못했다.


그다음으로 흔들린 건
관계였다.


나는 그날
평소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먼저 나서지 않았고,
분위기를 맞추지 않았고,
늘 내가 맡아오던 역할을
조금 내려놓았다.


큰 거절을 한 것도 아니고,
선을 그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내가 늘 하던 방식으로
관계를 관리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 결과는
즉각적으로 드러났다.
공기가 달라졌고,
조금 어색해졌고,
관계는
이전보다 느슨해졌다.


예전의 나라면
그 틈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먼저 메웠을 것이고,
내가 먼저 웃었을 것이고,
내가 먼저 접었을 것이다.


그날은
그러지 않았다.


관계가
완벽하지 않은 상태로
그대로 남아 있도록 두었다.


그 선택은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했다.
관계가 멀어질까 봐,
나만 이상해 보일까 봐
마음이 계속 흔들렸다.


하지만 하루가 끝났을 때
나는
나를 남긴 상태로
그 자리를 떠나 있었다.


그날 알게 됐다.
모든 관계를 유지하는 선택이
항상 나를 살리는 것은 아니라는 걸.
그리고
나를 지우지 않고도 남아 있을 수 있는 관계만이
앞으로의 시간이 허락된다는 걸.


그날
괜찮은 척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 묻지도 않았지만,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하루를 정리하기 위해
그 말부터 꺼냈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았어.”
“이 정도면 잘 넘겼지.”


그날은
그 문장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괜찮지 않다는 말을
굳이 선언하지도 않았고,
힘들다는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냥
그 상태 그대로
하루를 끝냈다.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설명하지 않아도
상황은 흘러갔고,
괜찮은 척을 하지 않아도
하루는 마무리됐다.


그날 밤
나는 여전히 피곤했지만
텅 비어 있지는 않았다.


기준이 바뀐 하루는
이렇게 작동했다.
무언가를 더 하지 않아서
조금 덜 닳았다.


이제 나는 안다.
이 기준은
나를 갑자기 단단하게 만들지도 않고,
문제를 해결해 주지도 않는다.


다만
하루를 끝냈을 때
내가 나에게
빚지지 않게 만든다.


이 기록은
앞으로도 아마
이런 이야기들일 것이다.
무언가를 해낸 날보다
하지 않은 선택들,
참은 순간보다
멈춘 순간들에 대한 기록.


겉으로 보면
아무 일도 없는 하루들.
하지만 그 안에서
나는 계속
덜 사라지는 쪽을
연습하고 있다.


버티지 않기로 한 기준은
이렇게
하루의 끝에서
조용히 나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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