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파괴의 신 흰둥이
4년 차 강아지가 있는 집에는 인형이 품귀현상을 보인다는 논문(?)이 있다. 우리 집도 그랬다. 흰둥이가 식구가 된 이후 내가 어릴 적부터 모아 온 인형들의 수난이 시작된 것이다.
멸종위기에 처한 인형을 구하기 위해 강아지 전용 장난감을 사주었지만 흰둥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인형들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떤 인형은 눈과 코가 뽑히고, 배가 터져 솜이 튀어나오거나, 귀와 다리는 뜯긴 채 처참히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매일 같이 인형들의 솜 조각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그 모습은 아직 남아있는 인형들을 공포로 몰고 갔다. 귀여움을 상실한 인형은 이 세상 최강 귀요미에게 무참히 파괴되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당시 하나둘 모으기 시작한 솜이 없는 피규어 소니엔젤도 예외는 아니었다. 호시탐탐 노리는 흰둥이 때문에 늘 높은 곳에 있었지만, 안전은 장담할 수 없었다.
주세요~
주세요!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올려두어도 이런 표정으로 달라고 떼를 쓰면 안 줄 수가 없었다.
귀여움이란 실로 엄청난 힘을 가져서 인간은 그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흰둥아 그냥 보고만 놀아, 귀 잘라먹으면 안 돼!
씹어 먹지 말고, 뜯어 버리지도 말라고 간곡히 구슬리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거 귀 뜯어 버리면 안 돼요?
나 막 뜯고 싶은데...
정말 안되나.
그렇게 말하는 듯한 흰둥이의 표정에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유혹에 넘어가지 말 것을, 괜히 주었나 후회해 본들 소용은 없었다.
흰둥아, 좀 참아 주면 안 되겠니.
그럼 이거는요?
이케 이케
방울 막 뜯으면 안 돼요?
소니엔젤을 무사히 돌려주었으니 고맙다.
그래 흰둥아, 그 볼펜쯤은 네 맘대로 하렴 ㅠㅠ
누나가 예뻐서 샀는데, 뭐 너만큼 예쁘고 아끼는 물건도 아닌데 뭘.

그래, 맘대로 해라!
대신 사진 한 장만 찍자. 나도 뭐 하나는 건저야 하는 거 아니겠니?
잠시만 기다려봐.
쳇!
치사하게 사진만 찍고,
계속 기다려만 하고..
언제까지 가만히 있어야 하는 건데요?
에잇,
받아랏!!!
다행히 말을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나의 흔들리는 눈빛을 알아본 것인지 흰둥이는 무사히 피규어를 돌려주었다. 하지만 볼펜은 트레이드 마크인 보송보송한 방울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분명 '흰둥이만큼 예쁘고 아끼는 물건도 아닌데 뭘.'이라고 쿨하게 말했지만, 사실 볼펜의 보송보송한 방울이 마음에 들었기에 아쉬운 마음도 있었다. 흰둥이에게는 찰나의 놀이였겠지만, 내게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귀여운 물건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이후 난 피규어를 미끼로 흰둥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셔터에 담긴 사진들이 여전히 초점을 잃고 안드로메다로 가기 일쑤였지만, 나는 흰둥이를 향한 애정과 새로운 촬영법을 얻은 것으로 만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