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
손잡이는 몽땅 녹아내렸고 몸통은 본래의 색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검은 숯덩이가 되어버렸다.
엄마는 가스레인지가 망가지지 않은 게 다행이라셨고 아빠는 삐삐 주전자 3개를 사서 오셨다.
주전자가 가스레인지 위에서 조금씩 타고 있을 시각, 멍멍이는 유난히 낑낑거렸다.
안절부절못하다가, 나를 바라보며 괜히 짖기를 반복했다.
'왜 저러지 심심한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내 코끝에 그제야 매캐한 냄새가 훅 들어왔다.
황급히 주방으로 뛰어가 불을 껐다. 멍멍이도 덩달아 앙앙~ 짖으며 내 뒤를 따랐다.
멍멍이는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전자가 타고 있다고.
기특했다가, 정말 알고 그랬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의문도 잠시, 새로 꺼내놓은 첫 번째 삐삐 주전자를 또 태워 먹고 말았다.
물이 끓으며 소리가 나는 시스템 덕에 한동안 별 탈 없이 사용했는데 소리가 나는 뚜껑을 열어 두고 불 위에 올려둔 게 문제였다.
물이 끓어도 울지 못하는 삐삐 주전자는 재기능을 하지 못하고 또 검은 숯덩이가 되어버렸다.
시험 기간이라 책상에 엉덩이를 붙인 채 낑낑대고 있었다. 몸 따로 마음 따로 머리 따로 내가 세 갈래로 나눠지는 고통에 허우적거리느라 가스레인지에 올려둔 주전자의 생사 따위는 잊고 말았다.
그때 이름도 지어주지 않은 강아지의 짖음 덕분에 그제야 냄새와 연기가 가득한 현실로 돌아왔다.
멍멍이는 기능을 상실한 삐삐 주전자 대신 울고 있었다.
멍멍~ 짖다 내가 바라보면 제자리를 뱅글뱅글 돌았다.
마지막 삐삐 주전자를 꺼내 놓으며 우리는 이 작은 구원자에게 드디어 이름을 지어 주기로 했다.
좀 특별하고 멋진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여러 후보 중 뭐가 좋을지 고민하다 이름을 쓴 종이를 던져 멍멍이가 물어오면 그것으로 하기로 했다.
멍멍이는 자신 앞에 툭- 떨어지는 종이에 멈칫하다 금세 하나를 입에 물었다. 얼른 뺏어 펼쳐봤더니 "흰둥"이라고 적혀 있었다.
사실 '흰둥'이란 이름은 그냥 써 놓은 것이라 이것이 될 거라는 생각은 1%도 하지 못했다. 뭔가 아쉬워 가위바위보도 삼세판이라며 다시 종이를 던졌다.
이번에도 정확히 "흰둥"이라고 적힌 종이를 물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종이를 던졌고 거짓말처럼 세 번째에도 "흰둥"이라고 적인 종이를 물었다.
엄마와 나는 당황했다. 이름을 지어줬다는 뿌듯함보다 세 번 연속 같은 이름을 선택한 녀석의 행동이 신기했다.
흰둥이는 "내 이름은 원래 흰둥이였어"라고 말하는 듯했다
지금도 가끔 엄마랑 나는 그때의 일을 이야기한다.
'아마 누가 들어도 믿지 않을 거야, 거짓말이라고 하겠지, 근데 정말 우리 흰둥이가 그랬었는데' 하며 아직도 신기해한다.
흰둥아~ 흰둥아~ 너는 이제부터 흰둥이야. 알았지?
흰둥아~ 하면 바로 와야 해!
그 후로 흰둥이는 삐삐 주전자가 울 때면 내 앞으로 와서 멍멍~ 짖었다.
손잡이가 살짝 녹은 마지막 삐삐 주전자는 한동안 흰둥이 덕에 제 몫을 할 수 있었다.
한 달이 넘도록 이름 대신 그저 멍멍이라 불리던 녀석에게 흰둥이라는 이름과 함께 주인이 생겼다.
바로 우리 가족!
나와 흰둥이는 반려인과 반려견이 되었다.
나의 꽃 흰둥이와 함께한 세월이 벌써 12년째다.
이 우주 생명체는 도대체 무엇이기에 나에게로 와서 '흰둥이'라는 꽃이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