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둥이 깁스를 하다.

2005년 11월

by 모레


길 위에 가을이 있었다.


장염을 이겨낸 흰둥이는 봄에 입었던 옷이 작아질 만큼 부쩍 자랐다.

외모에도 변화가 왔다. 그저 뽀송뽀송 귀엽기만 하던 아기 얼굴에서 나름 늠름한 잘생김을 풍겨내기 시작했다. 내 눈에는 그랬다.

내심 살짝 구부러진 오른쪽 귀가 안 펴지면 어쩌나 걱정이었는데 쫑긋 힘 있게 드디어 펴졌다. 무엇보다 흰둥이가 아프지 않다는 게 나는 가장 좋았다.



딱- 거기까지,

그해 11월. 어느 토요일 오후. 흰둥이가 다리를 다치기 전까지는.


스크린샷 2025-11-12 오후 6.42.55.png


흰둥이는 그날 오후 아빠와 산책을 나갔다.

1시간이 지났을까? 집으로 전화가 왔고 아빠의 다급한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쩌렁하게 울렸다. 실수로 목줄을 놓쳤는데 흰둥이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고.


처음엔 그냥 장난인 줄 알았다. 흰둥이는 성격이 조심성이 많고 주인을 잘 따르기 때문에 목줄을 놓쳐도 멀리 도망가지 않는다. 게다가 아빠는 평소에도 흰둥이를 숨겨 놓고 없어졌다며 나를 놀리시던 분이었다,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정말 진짜라며 아빠는 흰둥이가 없어졌으니 빨리 나와 찾아보라고 하셨다. 대체 어디서 어떻게 놓쳤냐고 물었지만 모른다는 말만 돌아왔다.


나중에 알게 된 상황은 이랬다.

모임에서 술을 드신 아빠는 술도 깰 겸 흰둥이를 데리고 산책을 가셨고 길에서 아는 분을 만나 이야기 나누는 사이 술기운에 잡고 있던 리드 줄이 손에서 빠져나가는 걸 채 느끼지 못하셨던 거다. 주변 어디에도 흰둥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제야 급하게 전화를 하신 것이다.


상황을 파악하고 나니 머리가 하얘졌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찾아야 할지 걱정이었다. 다행히 인식표를 하고 있으니 누군가 발견해 연락 주기를 바라며 휴대폰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흰둥이를 찾으러 나가기 위해 외투를 입는 순간, 멀리서 깨갱 거리는 강아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흰둥이다~!" 소리치며 베란다로 뛰어나갔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려다봤지만 흰둥이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 들리는 것 같던 소리는 어디에서도 울리지 않았다. 그때부터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늘 예쁜 짓만 하고 말썽 하나 없었는데, 힘들게 장염도 이겨냈는데 속상했다.


덜덜 떨리는 손을 잡고 아파트 놀이터를 지나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순간, 모퉁이를 돌아 흰둥이가 나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흰둥이는 뛰어와 내 품에 그대로 안겼다. 그리고 처음 듣는 목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누나 보고 싶었어.
나 무서웠어. 누나, 누나~


하는 것 같았다.

뒤에 따라오던 엄마가 흰둥이 발에서 피가 난다고, 다리가 이상하다고 소리치셨다.


자세히 보니 오른쪽 다리가 다친 것 같았다. 발톱은 모두 빠지고 피가 났다. 내 옷에도 붉은 흰둥이 피가 흥건하게 젖어 들어갔다. 품으로 뛰어와 안겼던 그 자세 그대로 흰둥이를 안고서 병원으로 갔다. 흰둥이는 아파서 비명을 지르며 울었다. 나는 쉽게 자세를 바꿀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교통사고로 인한 다리 골절이었다.


아빠의 손을 놓치고 집을 찾아 헤매던 중 차에 치였던 것이다. 이만한 게 다행이라고, 그 다리를 하고 집을 찾아온 게 기적이라 생각하려 했지만,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흰둥이는 퇴원 후 깁스를 한채 집으로 돌아왔다. 두 달은 저 초록색 깁스를 하고 지내야 했다. 빠진 발톱은 매일 소독과 약을 발라 줘야 했고 되도록 움직이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그런데 흰둥인 누구도 발톱 소독을 할 수 없게 예민해졌다. 아팠으니까 당연한 거였다. 나는 긴장하며 소독을 시도했지만 허사였다. 대신 흰둥이는 아빠 손은 허락했다. 참 이상했다. 아빠랑 나갔다가 다쳤는데 아빠가 밉지 않았을까?


아빠는 퇴근 후 흰둥이 발톱 소독을 맡아하셨다.

어쩜 당신을 이해한다는 뜻이었을까? 아니면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을까?


미안한 마음이 컸을 아빠는 잘 먹어야 뼈도 잘 붙는다며 한우 사골과 고기를 떨어지기 무섭게 사 오셨다. 그런 간호에 흰둥이는 두 달 예정이었던 깁스를 한 달 열흘 만에 풀어버렸다. 그리고 체중은 두 자릿수를 경신하게 되었다.


뼈와 함께 살도 왕창 붙어 버렸지만 치료가 잘 마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작고 어린 강아지가 가족의 손을 놓치고 거리를 헤매다 사고를 당하고 혼자서 집을 찾아왔으니 그만한 게 얼마나 다행인가. 그 길이 얼마나 길고 두렵고 무서웠을지.


다이어트가 시급했지만 당장 급한 건 다른 것이었다.

흰둥이 몸에서는 청국장과 된장, 블루치즈 같은 온갖 발효식품 냄새들이 팍팍 풍겼다. 깁스를 풀자마자 목욕을 하는 건 스트레스라 일주일은 더 지켜봐야 했다.

나는 한동안 역대급으로 업그레이드된 꼬순내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래도 흰둥아 너
더는 아프거나 다치지 말자
이만큼 속 썩였으니까
너 꼭 대학갈때까지 살아야 해!
알았지 약속 얼른!
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