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중심을 회사에서 나로 옮기는 방법
순간을 분절해서 기억하는 수단
직장인의 1년은 정말 짧다. 연초에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과 신년회를 하다 보면 어느새 금 방 설날이 된다. 설날 명절이 지나고 올해의 목표를 세팅하고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는 시간은 3월이다. 3월부터 3~4개월 정도 1~2개의 기획 프로젝트를 하고 여름휴가를 떠난다. 하반기에는 올해의 성과가 결정되는 10월까지 대부분의 프로젝트를 완료시키고자 노력한다. 그렇게 11월이 되면 고과 평가시즌과 인사시즌이 겹치며 들뜬 마음의 상태가 되고 내년도 업무 기획을 위한 워크숍 등을 진행하며 연말을 맞이한다. 특히 만약 내가 매년 특정 시점에 일정하게 해야 되는 사업계획 수립 같은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일상과 같은 일이기 때문에 거의 시간이 삭제되는 경험을 한다.
이렇듯 직장인의 1년은 실제로는 6개월이다. 그리고 그 6개월은 2~3개의 프로젝트로 요약된다. 1년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던 것 같은데, 뒤돌아보면 나에게 남는 것은 몇 개의 보고서뿐이다. 때로는 이 보고서와 내가 했던 행위가 세상에 어떤 긍정적인 가치를 보여줬을까 생각하며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직장인은 모두 이렇게 1년의 삶이 기억에서 사라져 없어지는 기억상실증을 겪는다.
뒤돌아보면 직장인으로 산 10년은 1년을 10번 더한 것보다 훨씬 짧았다. 10년이면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녔던 시간과 같은데, 어린 시절의 순간들은 하나하나 쪼개져서 기억되는 한편 직장인으로 10년의 기억은 큰 덩어리로 기억된다. 1년이 몇 개의 프로젝트로 기억된다고 하면, 10년은 나의 인사기록 카드에 기록되어 있는 몇 개의 조직 이동으로 기억된다. 가끔 과거에 내가 최선을 다해했던 프로젝트의 문서를 열어보면 내가 이런 일도 했나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10년의 시간이 마치 2~3년 정도로 압축되고, 구체적인 순간이 아닌 흐릿한 이미지만이 기억난다.
이는 직장인이 되는 순간 나의 정체성이 정년 퇴직하는 순간까지 직장인이라는 개념에 갇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동안의 인생에서는 나의 정체성이 굳이 내가 정체성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유치원생/초등학생/중학생/고등학생/대학생/석사/박사라는 정체성을 사회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부여해 줬다. 나는 그냥 다음 단계로 진입하는 결정만 하고 그 안에서 시간을 보내면 자연스럽게 나의 정체성이 시간을 보내며 정립되고 갱신되었다. 그러나 직장인이 되는 순간 정년퇴직을 할 때까지 30년 이상의 시간 동안 일도 바뀌고 관계도 바뀌고 직급도 바뀌겠지만 큰 정체성은 직장인 그대로이다.
직장에서의 시간을 10년 5년 1년이 단위가 아니라 분절하지 않으면 직장기억상실증은 더욱 악화될 것 같다는 위기감이 찾아왔다. 아마도 나이를 한 살 한 살 더 먹을수록 신경 쓸 것도 많고 나의 신체적인 역량도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좋아지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중 가장 젊은 시절의 나의 시간을 나의 하루를 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을 분절해서 기억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때 찾은 것이 글쓰기였다. 직장에서의 글쓰기는 일상의 중심을 회사에서 나로 옮긴다. 기존에 회사 중심의 연간 스케줄이나 회사 중심의 프로젝트로 시간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덩어리 지어 있는 순간을 하나하나 해체하고 분절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느낀 나의 감정과 나의 생각을 기억한다. 글쓰기는 일상의 중심이자 주체가 된 나의 순간에 대한 생생한 영상을 찍는다. 치열하게 무언가를 고민했던 순간, 때로는 그 안에서 희열 혹은 좌절을 느끼는 순간, 무언가 한 뼘 성장했던 순간을 직장기억상실증 환자의 뇌에 의존하지 않고 기록한다. 그리고 기억한다. 나의 가장 젊은 시절의 순간이 몇 개의 단어로 뭉뚱그려지는 것이 아닌, 하나하나가 과정으로 생생히 살아있고 그것이 연결되어 스토리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각자의 스토리가 세상의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때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의 끝이 다른 사람의 시작이 되기를, 나의 고민이 누군가에게는 힌트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