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행복 한 자락
시골의 5일장은 인근 지역과 하루 이틀 차이를 두고 열린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 열리는 '홍성 5일장'을 주로 가지만 날짜가 맞지 않으면 가까운 '청양 5일장'과 '예산 5일장'을 번갈아 간다.
이제 집 바로 앞에 크고 깨끗한 마트가 생겨 언제든 편하게 식재료를 구입할 수 있는데도 나의 시골엄마는 아직도 시골장을 즐겨 찾는다. 주말을 맞아 오랜만에 다녀온 시골집에서 엄마와 함께 예산 5일장을 찾았다. 머리 위로 손을 뻗어 엄마 손을 잡고 따라다녀야 했던 꼬맹이가 이제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팔짱을 끼고 걷는다. 만두 사달라 찐빵 사달라 졸라대던 딸은 척척 지갑에서 돈을 꺼내 엄마 대신 계산할 정도로 커버렸다. 엄마가 먼저 이것 좀 사달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어느새 시간이 이만큼 흘렀구나 하는 것을 느낀다.
색이 너무 예뻐 눈을 뗄 수 없는 새빨간 석류 앞에 멈춰 섰다. 시장에서 시식은 필수. 석류 한쪽 끝을 잘라 새빨간 알갱이를 떼어 씹어본다. 길에 서서 석류 반쪽을 거의 다 먹어 치워도 주인장은 맛을 봐야 사는 거라며 웃고만 있다. 마트에서 예쁜 모양만 보고 샀다가 너무 시어서 낭패를 보곤 했는데 맛이 보증되니 망설임 없이 석류를 산다.
안동사과는 열다섯 개를 만원이면 살 수 있다. 역시 시장의 매력은 넉넉함이다. 열다섯 개의 사과에 덤으로 얻은 두 개를 더해 봉지가 터질 듯 들고 돌아선다.
없는 것 빼곤 다 있는 시골 장. 길 한쪽 약재상에도 들른다. 생수를 싫어하는 엄마는 곧잘 시장에서 몇 가지 약재를 사다가 물에 넣고 직접 끓여 드시곤 한다. 헛개열매며 감초, 말린 여주 등을 넉넉히 산다.
생선을 유달리 싫어해 생선전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나지만 생선전에는 물고기만 있는 것이 아니니 구경을 가기로 한다. 제철인 꽃게와 낙지 천지다. 꽃게의 발버둥에 물이 사방에 튀기도 하고 낙지는 자꾸 대야를 탈출해 주인아주머니의 손에 검거된다. 그리고 지금 계절에 단연 많이 나와 있는 것은 굴! 인근 천북에서 껍질채 가져다가 할머니들이 앉아 한 알 한 알 까고 있다. 눈앞에서 까주니 믿을 수 있고 오래 보관해 놓은 것이 아니니 싱싱해서 절로 군침이 돈다.
김장철이라 김장재료들이 많이 눈에 띈다. 배추, 무, 마늘, 생강, 마른 고추 등 없는 것이 없다. 식구가 적어 몇 년 전 김장 종료 선언을 했던 엄마였는데 예쁘게 생긴 무를 그냥 지나치지 못해 동치미용 무를 사고 말았다. 이렇게 작고 예쁘게 생긴 무로 동치미를 담가 두면 밥도둑이 따로 없다.
오랜만에 함께 장에 나와서인지 석류며, 사과, 무, 약재 등 무거운 것들을 잔뜩샀다. 양손이 빨개지도록 짐을 들고 집으로 돌아온다. 가는 곳마다 당연히 덤이 있고, 흥정이 있는 시장은 어쩐지 차가 워보이는 마트와는 참 다른 세상이다.
집에 도착한 우리는 시장에서 사 온 굴을 잔뜩 넣고 김치를 송송 썰어 시원하게 국을 끓여 저녁을 먹었다. 그리곤 무를 손질해 베란다에 방치되어 있던 작은 장독 두 개에 시원한 동치미를 담갔다. 지하수를 쓰던 시절엔 동치미가 참 맛있었는데 아파트로 이사를 오고 나니 물탓인지 김치가 옛날 맛이 나지 않는다고 투덜거리신다. 모든 정리를 끝낸 늦은 하루의 끝, 머리를 맞대고 앉아 다람쥐들처럼 석류를 까먹고서야 잠자리에 든다.
썩 재미있고 즐거운 하루다. 든든한 음식에 몸이 그득해지고 오늘 본 풍경을 곱씹으니 마음도 그득해진다. 그득한 몸과 마음 덕분에 나는 또 힘이 난다.
오늘 하루, 지금 이 순간
너무 힘들다고 포기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시골장에 한번 가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평균 연령이 65세는 훌쩍 넘을듯한 어른들의
치열하고 성실한 시간이 그곳에 있다.
얼굴은 주름지고 허리는 굽었지만
펄떡펄떡 살아 숨 쉬는 그들의 인생이 그곳에 있다.
그 자체로 아름다운 그림이며 나에겐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동기부여가 된다.
어디선가 이런 글귀를 봤다.
'세상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오늘입니다.'
이 말이 와 닿지 않는다면
더 늦기 전에 삶의 감사함이 있는 그곳에 꼭 한번 가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