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더라도
그 시련에서 여전히 유용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하지만 만약 피할 수 있는 시련이라면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행동이다.
왜냐하면 불필요한 시련을 견디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시련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부쩍 바빠진 회사 업무로
중간 틈내기가 어려워
최근 평일 아침 기상을
30분 앞당겼습니다.
알아서 눈이 떠진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겁니다.
글 모임에서 하는 짧은 글을 쓰고,
시간이 허락되면 공저 책과
이전 짧은 글의 퇴고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은 부산하지만
이것 또한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설정하니 거부감이 들지 않더군요.
대학시절,
겨울방학기간을 이용해 장춘이란 곳에
어학연수를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어요.
우리나라 유학생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북경과 같이 한국 유학생이 많다는 건
생활이 편리한 점도 있지만
중국어를 사용할 상황이
적어지는 단점도 동시에 지니고 있죠.
그래서
중국어를 할 수밖에 없는
구조와 상황을 만들기로 하고
어학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단기간이었지만
생각보다 효과가 컸습니다.
언어 수준은 낮았지만
꿀 벙어리였던 제가
두 달쯤 지났을 때 선생님과 스스럼없이
중국어로 대화하는 저를 발견했으니까요.
<배우 천우희 벼랑 끝에 서보면 안다. 사람은 살고 싶은 본능이 생긴다는 걸.>
혹사하는 것은 싫지만
성장을 원한다면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이를테면, 공개적으로 밝히거나
돈을 지불하고 학원을 다닌다거나
여럿이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를 하는 것이죠.
혼자서 의지가 약해졌다고 판단하면
가끔씩 위에 언급한 방법 중에 하나를
택합니다.
공저를 하겠다는 말한 것도
짧은 글짓기 모임에 참여한 것도
여럿이 하면 용기도 얻고
마감시한이나 누군가가 지켜본다는
사실 때문에 실행하게 만듭니다.
벼랑 끝에 몰렸을 때,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그 위기를
모면하려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지나서 보면
어떻게 이 많을 걸 했을까 하고
신기해하기도 합니다.
목적과 방향을 잃고 있다면
과감하게 뛰어들어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보세요.
저지르면 수습하는 게
사람의 본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