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해씨 Jun 15. 2023

애니메이션 <붉은 거북>

애니메이션 <붉은 거북> - 대사가 사라진 여백에 가득 채운 생의 비밀스러운 아름다움.  

   

남자가 표류하게 된 상황에 관해서는 설명이 없다. 표류 중이던 남자가 파도에 밀려 무인도에 도착하는 것으로 애니메이션이 시작된다. 섬에 머물며 기운을 차린 그는 뗏목을 만들어 섬을 떠나려 하지만, 붉은 거북이 나타나 떠나려는 남자를 방해한다. 붉은 거북이 남자를 방해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별다른 설명은 없다. 화가 난 남자는 붉은 거북에게 복수하듯 화풀이를 한다. 죽은 듯 쓰러져 있는 붉은 거북에 연민을 느낀 남자의 노력 덕분인지 거북은 환생하듯 여인으로 변신한다. 남자는 섬을 탈출하는 것을 포기한다.


둘은 아무도 없는 섬에서 부부처럼 생활하게 된다. 아이가 생기고 성장하고 하는 동안 생의 가장 즐거운 시간도 고난의 시간도 펼쳐진다. 아이가 성장한 뒤 출가시키기까지 둘은 여느 부모의 삶과 다르지 않은 시간을 보낸다. 말년은 아내와 함께 아름답지만 제법 쓸쓸해진 섬을 지키며 살다가 별빛이 유난히 아름다운 어느 날 남자는 홀연히 눈을 감고 생을 마친다. 무인도에 혼자 표류한 남자의 일생에 반려해주었던 여인은 다시 붉은 거북으로 변신하며 바다로 떠난다.

    

애니메이션 <붉은 거북>은 러닝타임 80분간 대사가 없이 진행된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하는 감독 마이클 두덕 드 비트는 대사 없는 애니메이션 제작으로 유명하다. 대사를 없앤 대신 영상에 공을 들이는 방법으로 관람자들을 몰입시킨다. 대사가 사라진 여백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 물 소리, 파도 소리, 바람 소리, 물이 부서지는 소리, 자연에 적응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말이 아닌 짧은 의성어들이 자리한다. 그리고 익숙한 그것들의 의미에 다시 귀 기울이게 한다. 생소한 듯 익숙한 소리와 그 의미들을 다시 새겨준다.


드로잉은 단순한 듯하면서도 자연스럽다. 소박한 형태인데 유려하다고 무척 섬세하다. 자연을 단순화하여 그림으로 옮겨놓았지만,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게 하는 것이 그의 애니메이터로서의 탁월성 중 하나인 듯하다. 거북이와 인간이 어울려 헤엄치는 장면의 물과 빛과 소리와 움직임들을 열중해 보다가 함께 헤엄을 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모든 두려움이 사라진 곳에 어떤 충만한 정서가 함께함을 느끼게 되는데 나는 그때 ‘자유’를 떠올렸던 것 같다.  그림과 동작의 연출에 스튜디오 지브리의 인력이 제작에 참여했다고는 하나, 지브리와는 또 다른 드 비트 감독만의 애니메이션 기법이나 스타일을 경험할 수 있다. 세세한 부분은 눈여겨볼수록 애니메이션이 가진 매력에 흠뻑 젖어 들 수 있다.


인간사의 주요한 여정인 정착,  가정, 출산, 성장, 떠남, 기다림, 그리움 그리고 죽음을 바다와 섬과 하늘과 별들의 아름다운 움직임과 소리의 향연을 배경으로 함께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차분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해준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나처럼 신비, 혹은  인생의 비의 秘義 에 한발 다가갔다 돌아온 듯한 느낌에 빠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인간 보편의 정서를 툭 건드리며 여운을 강하게 남겨주었는데 남자와 일생을 함께했던 여인이 붉은 거북으로 다시 변신하고 바다로 돌아가는 장면에서는 나는 가슴이 제법 뻐근했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위해 손가락을 오므려 내 손바닥을 지긋이 문지르며 그 동작을 물끄러미 바라보아야 했다.    

그의 다른 작품  <아버지와 딸>처럼 <붉은거북>도 바다가 이야기의 중심 배경이 된다. 공통점이 우연이 아닌듯해서 드비트 감독이 바다에서 특별히 느끼는 자신만의 정서가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바다와 거북을 키워드로 나만의 해석이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으나 다음 작품을 기대하기로 했다.

 

원제 <Red Turtle>은 2016년 칸 영화제에서 주목할만한 시선의 특별상을 받았다. 2017년 제44회 애니어워즈 장편 독립 영화 부문 대상을 받았으며,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 애니메이션 작품상에 지명되었으나 수상하진 못했다. 동유럽 주요 영화제이자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서 열리는 국제애니메이션 영화제인 제27회 자그레브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장편 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행복과 평정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