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날 위에서도 같이 잔다는데
부부가 마음이 맞으면 칼날 위에서도 같이 잔다는데
우리 부부에게 한 번이라도 그런 날이 있었나 싶다. 내가 치킨이 먹고 싶다 하면 저는 한사코 소고기를 고집했다. 그때마다 소 닭 쳐다보듯 한다는 말이 생각났다. 우린 그렇게 소 닭이 되어 권태기를 건너왔나 보다. 그 후로 저가 꽃다발을 사달라 조르면 나는 꽃등심을 사주었다. 진주목걸이를 선물로 받는 꿈을 꾸었다고 결혼기념일 즈음에 아내가 넌지시 내게 말했을 때 나는 해몽 책을 사다 주었다. 꿈과 현실은 늘 반대로 진행된다는 풀이가 들어 있으니 빈틈없이 읽어보라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한번은 잠결에 서로 이불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내가 있는 힘을 다해 잡아당길 때 반대편에서 이불자락을 살짝 놓아버리는 일이 있었다. 침대에서 떨어진 나는 장롱 모서리에 갈비뼈를 부딪치는 바람에 왼쪽 7번째 갈비뼈에 금이 간 적이 있다. 그때 러키 세븐이 아직 인간사에 회자하는 이유는 그것이 한 번도 럭키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하필 7번 갈비뼈라니. 그때의 고통을 생각하면 일심동체는 고사하고 천하 웬수가 아닌가 싶어진다.
<부부 같이 사는 게 기적입니다>라고 ‘가족 상담 전문가가 전해 주는 행복한 결혼 생활의 비결’이라는 부재가 붙은 책 광고를 본 적이 있다. 우리 30년 훌쩍 넘은 세월을 지진 날도, 볶은 날도 하 많았지만 큰 굴곡 없이 살아온 것을 다행으로만 여길 뿐인 평범한 우리 삶도 어쩌면 기적에 필적하는 대 서사일까? 책을 읽어보지 않아 저자가 말하는 기적의 의미는 잘 모르겠으나 지나온 세월이 제법 가상한 부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대충 놓아먹이며 길러온 듯한 두 아이 맘과 몸이 모두 건강하게 자라 주었고. 어느덧 제 역할에 충실하고 다정하게 어울리는 사회인으로 성장해 준 것을 보면, 그 어느 틈에 기적의 같은 순간이 있었으려나? 아니면 우리는 지금 기적의 상황 안에서 기적을 만들어가고 있으려나? 하며 잠시간 흐뭇해했다.
올해 겨울 유난히 춥다. 남쪽 도시 통영으로 가서 싱싱한 해산물도 맛보고 파란 바닷가랑 산동네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이 겨울 따뜻한 바람 좀 쐬고 오자 했더니, 춥디추운 산골짜기 고창 선운사 동백꽃이 보고 싶다고 기어이 고창에 숙소를 예약해버리기 전까지는.
댄장 ‘It,s miracle!’ 이다.
오늘 아침 눈을 뜨고 여느 날처럼 아침 청소를 시작했다. 책상 주변을 정리하고 정강이에 달라붙어 졸라대는 고양이들을 위해 새 밥을 챙기고 새 물을 챙겼다. 청소기를 들려는데 몸이 이상 신호를 보내왔다. 으슬으슬 춥고 뼈마디가 욱신거렸다. 이마에는 땀방울까지 송골송골 맺히며 몸살 기운이 느껴졌다. 도로 침실로 들어가 들어 누워버렸다. 퇴직 후 몸 여기저기의 신호에 나는 예전보다 훨씬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럴 때면 돌도 씹어 삼킬 듯했던 젊은 날이 그리워진다. 내 젊은 날을 다시 돌려준다면 능히 기적을 이룰 텐데 하며 소심해진 나는 침대에서 뒹굴며 넷플릭스에 접속했다.
김꼰대님에게 추천해준다는 영화 중 하나 골라 보다 잠들고 보다 잠들고를 반복했다. 영화는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아나키스트 부부가 주인공이었다. 임신한 몸으로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던 그 여자 주인공이 인상적이었나? 잠길과 꿈길 사이를 오락가락했던 탓에 몇몇 씬의 인상과 이미지만 남아있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 두 주인공이 자신의 이상을 위해 흔들리지 않고 풍파를 헤쳐가는 모습과 부부의 평생 신뢰와 헌신이 꿈결처럼 까뭇까뭇 떠올랐다.
종일 더운물만 몇 잔 먹었을 뿐인 뱃속을 달래려니 갑자기 달달한 짜장면이 생각났다. 몸은 제법 힘들어도 아내 퇴근하면 달콤한 간짜장을 먹으러 외출 생각으로 오늘 저녁준비는 쉬기로 했다. 오후가 되어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나 여전히 무거운 몸을 끙끙거리며 고양이를 보살피고 많은 양의 재활용 쓰레기를 분리했다. 햇볕 따스한 거실 바닥을 뒹굴다 잠든 고양이들의 유연한 관절과 그 평화가 부러웠다.
아내가 퇴근 무렵에 전화를 해왔다. 아내도 오늘은 어쩐 일인지 종일토록 어지럽고 구토증세가 있어 고생했다고 전한다. 나도 오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말하니 “우린 왜 같은 날 동시에 아프지?” 한다. 이어서 “일심동첸가?” 힘없이 큭 큭 거리며 건성으로 내뱉었다. 이어서 떡볶이랑 순대랑 잔뜩 사서 퇴근하는 중이니 저녁으로 대신하자고 한다. “일심동체면 간짜장….”이라고 대답하는 중에 전화가 툭 끊어진다.
씨유에 다녀왔다. 짜파게티를 끓이려 물을 올렸다. 도마를 꺼내고 파를 다듬어 올렸다. 아내가 이케아에서 사 왔다는 날 좋은 식도를 꺼냈다. 파와 칼을 닦기 위해 수돗물을 틀었다. 나는 잠시 후, 날이 잘 세워진 은색 번득한 칼로 흐르는 수돗물을 향해 무수한 칼질을 해대고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전설의 명검을 들고 싱크대 공간을 창공 삼아 좌우분간 없이 날아오르며 화려한 칼춤을 추는 나는 어느새 칼로 물 베기의 은둔 고수로 변신해 있었다. 일심동체파쇄검(一心同體破碎劍)을 시전했고, 검상동침파타검(劍上同寢把打劍)은 더욱 능숙하게 시전했다. 스스로도 자못 비장했으며, 명검이 품어내는 빛줄기와 검기가 주방을 압도했다. 칼날을 휘젓는 동안 언뜻 이케아 표 은빛 보검의 날렵한 표면에서 일곱 색의 무지개가 번쩍하고 내 눈에 반사되었다.
Oh! ‘It,s miracle!’
짜파게티는 완성되었다. 아내가 도착했다. 너. 한 젓가락도 안 줄 거임.
2023년 2월 어느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