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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해씨 Jun 29. 2023

꼰대 꼰대 꼰대

청춘 꼰대

‘저는 5년 차 직장인인데요. 월요일에 신입사원이 새로 들어왔는데 아침에 출근할 때나 저녁에 퇴근할 때 한 번도 인사를 안 하더라고요. 첫날도 아니고 5일째인데 아직도 그러는 건 조금 아니다 싶어서 다른 동료 선후배들한테도 물어봤더니 인사받은 기억이 없다고 하길래 좀 전에 조용히 따로 불러서 인사하고 다니자고 얘기했어요. 근대 그 후배과 인사는 아무나 먼저 해도 되지 않냐고 죄송하데 너무 꼰대 같으시다고 얘기해서 말문이 막혔네요. 요즘은 인사 안 하는 신입에 인사하라고 한마디 하면 꼰대인 건가요?’


언젠가 꼰대라는 용어가 한창 회자할 때 SNS를 떠돌던 일종의 하소연이다. 자기도 누군가에게 꼰대라는 욕지거리를 겉으로든 속으로든 내뱉었을 텐데 그 소리를 자기 후배로부터 직격으로 듣고 나니 저으기 당황한 흔적이 글에 묻어있다. ‘그래 너 꼰대 맞다 네가 싫어하는 그 꼰대’라고 혼자 낄낄대며 속으로 답해주었었다. 주변의 모든 어른을 꼰대라고 부를 때가 있었지. 특별히 선생님들과 부모님을 지칭할 때도 있었고. 그건 잔소리 제법하는 어른들에 대한 일반화된 호칭이었었다. 요즘처럼 상종하기 싫은 기성세대에 대해 멸시를 담는 용어로 사용된 것이 아니었음을 알려나 궁금했다. 그리고 젊은 세대들이 자기들끼리 그 꼰대라는 멸시적인 용어를 서로 주고받고 있다는 것이 살짝 놀랍기도 했었다. 꼰대의 의미 진화와 사용 대상의 확장을 실감하게 되었다. 세상의 변화와 변용은 의외의 곳곳과 것것에서 놀랍게도 빠르고 다양하다.


중년 꼰대

집을 짓고 입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집 앞길로 자주 오가는 내 또래의 남자 하나가 있었다. 얼굴은 늘 붉게 상기되어있고 걸음걸이가 다소 느린 편이다. 시선은 고정한 채여서 주변을 살피며 걷는 모습이 좀처럼 보여주질 않는다. 옛날에 유행했던 말로 태도가 제법 뻣뻣하거나 안하무인인 사람에게 잘 했던 농담 “목에 뭔 깁스를 했냐?”라는 말이 생각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느 날인가 집 앞길 담장 주변을 정돈하던 중에 그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다소 격앙된 어조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이 마을에 이사해 온 지 얼마 안 된 것으로 아는 데. 거, 사람을 보면 인사 좀 하지! “한다. 반말인 데다 매우 거들먹거리는 표정이었다. 그 말을 듣던 순간 내 생각에 ”그러는 네가 보고 있는 이것(나)은 사람이 아니란 말이냐“ 했다. 이어서 ”이사 온 지 몇 날 되지도 않는 내가, 당신이 이 마을 사람인지, 저 마을 사람인지, 저 마을에서 이 마을을 거쳐 조기 조 마을로 스쳐 가는 사람인이 어찌 알 수 있담?“ ”근데 왜 반말이야 인간아! 하고 눈알만 추켜 떠주고 무시한 채 그냥 휑하니 집으로 들어와 버렸다. 

무척 싸구려 종이에 먹물 드로잉


나는 길가는 낮 선 사람에게 굳이 다가가 웃는 얼굴로 먼저 인사하는 습성은 없다. 그가 나를 알아보는 척하며 먼저 인사해 주기도 바라지도 않는다. 용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인사를 나누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까지 먼저 나서서 인사를 할 필요가 있는가 말이다. 이런 나를 그 인간도 ‘깁스 목을 가진 뻣뻣한 인간’으로 보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먼저 그에게 결례를 범했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다. 고등학교 시절 인사안하고 지나갔다고 가는 사람 불러 뒤돌려 세워놓고는 무자비하게 발길질해 대던 그 대단한 ‘선배님’이 생각났다. 대학 시절 과건물 앞 풀숲에 의도적으로 숨어서 후배들 지나가기를 기다렸던 대단한 선배 땡칠이도 생각났다. 숨어서 기다리는 사람을 알 턱 없이 지나치는 후배들 되돌려 세우고선 쌍욕을 보태가며 후배들에게 인사를 교육했던 그 대단한 ‘과 선배이자 조교였던 인간땡칠이의 교활한 웃음도 생각났다. 


 나때는 말이야

‘넌 나한테 먼저 인사해야 해’라는 생각은 무례한 꼰대 짓이다. 너의 기수가 높고 나이가 많다 하더라도. 인사라는 것은 서로의 인격에 대한 존중으로 누구나 먼저 할 수 있다. 이건 아마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을까 싶다. 조선 시대에도 나이가 많은 사람이 무조건 인사를 받아야만 한다는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변질된 유교 문화를 변질되었다고조차 생각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다. 인사에는 장유유서가 없다고 배웠다. 하물며 살 만큼 살고 인간 세사 겪을 만큼 겪었을 인간이 새로 전입해온 마을 사람에게 할 짓은 아니지 싶어지니 그 인간과는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남정네들의 서열본능 나한테도 그런 게 있으려나 스스로 돌아보게 되었다.


젊은 청춘들끼리도 꼰대 논쟁이고 중 늙은이끼리도 서로 꼰대 짓이고, 청춘과 노년 사이는 비하와 멸시 수준의 틀딱 논쟁이다. 세대 간도 꼰대 갈등이고, 세대 내도 꼰대 갈등이고…. 혹 저 젊은 꼰대가 그 중년 꼰대의 딸은 아니었을까? 그럴 확률은? 하는 하릴없는 생각을 하다가 내 아들딸 그 소식 없는 청춘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하는 생각에까지 미쳤다.


“근데 요즘 청춘들은 젠더갈등도 심상치 않아….” “쩝! 나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말이지” 하며 쩝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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