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보다 무생물이 친근한 날에는
걸어서, 제법 부담스러운 걸음이 필요한 거리라 하더라도 내 지근에 서점 하나쯤 있었으면, 저녁 식사 후 게으른 슬리퍼도 좋고, 삐걱거리는 자전거도 좋고, 날이 추우면 추운 데로 그렇게 웅크리고 낮은 걸음으로, 날 좋고 바람도 선선하면 휘파람 날리는 갈지자걸음으로. 그렇게 홀홀 다녀올 서점 하나 지근거리에 있었으면.
이유도 없이 하던 일에 흥미를 잃게 된 날. 그저 지나온 날들을 문득 되새김하다 욕지거리라도 낮게 내뱉게 되는 날. 그런 날들이 굳은살로 이마에 내려앉을까 두려운 저녁. 길 보채는 작은 강아지 깨방정 앞세워 갈 수 있는 길. 주황 가로등이 낮게 켜주는 이른 저녁 바람이 가슴에 와 안기는 길. 느릿하게 걸어가도 마주 오는 자전거가 위협하지 않는 길. 그 길 어느 언저리에, 그 서점에, 검은 뿔테의 젊은 총각이 진열대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몇 권의 책을 든 채 맞아주는 곳. 그 청년의 미소가 책의 향기처럼 환하게 켜진 서점 하나 있었으면.
풀들도, 새들도, 심지어 벌레들도, 죄지을 일이 없어 부끄럼 없을 그것들. 그것들의 속살이 부러워지는 날. 그런 날이 몇 날이 연속인 날. 허기진 배를 등짝에 붙인 곱등이 행색으로, 자장면 냄새 번지르한 중국집 붉은 간판아래를 지나, 창백한 형광등의 세븐일레븐을 지나, 주현미의 뽕짝이 마주치며 흐르는 풍기인견집에 다 가기 전 어느쯤에, 작은 서점 하나 있었으면. 거기에 수염이 제법 거뭇한 노총각의 검은 뿔테가 그날도 온전했으면.
강 건너 높은 미루나무가 그리워질 때면, 지금은 베어 없어진 높은 미루나무가 그리워질 때면. 없어진 미루나무 자리 위로 걸릴 단골 구름조차도 찾아오지 않는 날이면, 강 건너 배추밭이며 무밭들의 싱그러운 초록 연두가 그리워질 때면, 지금은 사라진 그 자리에 주차장과 분주한 사람들의 거래가 너무 뻔하고 뻔뻔하고 염증 나서 ‘츱!’ 하고 시선을 거두게 되는 날이면, 차라리 무생물을 끼고 뒹구는 날이 더 났겠다 싶어지는 그런 날이면. 예쁘고 견고한 활자들 한 봉 가득 담아 들고, 청양청과에 들러 파란 사과 한 봉 사 들고 퇴근할 수 있게, 서점 하나 지근거리에 있었으면.
어느새 결혼한 그 청년의 검은 뿔테도 잠시간 피곤하지만 여전히 안녕하시고, 그의 귀여운 딸아이가 종알리는 앙증맞고 동그란 노랫소리에 고소한 우유 냄새도 노오랗게 함께 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