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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해씨 Aug 16. 2023

음악다방 죽돌이 판돌이 그리고 다방커피

음악다방 죽돌이 판돌이 그리고 다방커피


학력고사를  치른 고3. 학교는 오전 수업으로 파했었다. 하교 후의 넉넉한 오후, 그 자유로운 시간을 음악다방에서 보낸 날들이 많았다.  본격적으로 커피를 접했던 때가 그때다. 추운 겨울날 값싸게 따뜻한 공간을 시간제한 없이 점유할 수 있었다는 것은 요즘 세상에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주말이나 방학 때는 친구들이 모이는 아지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커피 한 잔 마시고 온종일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일없이  죽치고 있는 녀석이라는 의미의 '죽돌이'라는 용어도 그 시기에 만들어진 용어이다. '음악 리퀘스트'라고 인쇄된 조악한 쪽지에  신청곡을 작성해 전달하면 다방 한 쪽에 자리한 음악실에서 하루 종일 신청곡이 흘러나왔다. 커다란 유리 칸막이 안에 LP 판이 가득  채워진 음악실에는 DJ가 아닌 '판돌이'가 열심히 LP를 찾아 돌려주었다.


전문  음악다방이 아닌 싸구려 음악다방은 DJ 지망생들의 아르바이트 공간이자 수련공간이기도 했다. 하여 싸구려 음악다방의 디제이는  멘트에 미숙한 침묵리우스 DJ였다. 그렇게 죽돌이의 반대편에는 늘 멘트 하나 없이 판 만 돌리다 음악실을 퇴장하는 '판돌이'가  있었다. 죽돌이와 판돌이는 한 쌍으로 탄생한 용어이다. 윤시내의 '그 음악은 제발 틀지 마세요. DJ!"라는 노래가 만들어질  정도로 유명 음악다방 DJ는 한때 인기 직업이었다.


70년대  후반, 80년대 초중반까지 한 시대의 풍속처럼 음악다방과 죽돌이는 전국적으로 벌어진 현상이었다, 젊은이들 중년들 할 그것 없이  다방으로 다방을 모여들었고, 그곳이 누구에게는 사랑방이었고, 누구에게는 사무실이기도 했으며, 누구에게는 아지트이기도 했고,  누구에게는 음악이 있는 문화공간이기도 했다. 돈도 넉넉하지 않고 할 일도 없고, 혼자 있기는 죽기보다 싫었으나 엉덩이는 돌덩이처럼  무거웠던 죽돌이들에겐 천국이었다. 한반도 남쪽에 커피를 대중화시키고 향후 커피 산업의 밑거름이 되게 된 커피문화 대중화의  메카였다고 할 수 있을까?


나와  친구들 무리가 아지트로 삼았던 저가형 음악다방은 커피 한 잔 250원이면 하루가 보장되는 곳이었다. 다방 이름은 근사한 '가베'  '비원' 따위가 아닌 '사랑방' 이었다. '사랑방 다방'은 말 그대로 사랑방이었다. 들락거리는 계층은 나이 지긋한 초로의  노인들부터, 한참 생산에 몰두하며 비즈니스로 미팅을 많이 해야 했던 중년들, 사회생활을 막 시작하는 초년들이 마구 얽혀 있는  곳이었다. 그곳의 초년들 구역은 한때 오랫동안 우리의 구역이었었다.


호마이카  칠로 마감된 싸구려 테이블 위에는 백 원짜리 동전을 넣어 하루 운세를 점쳐보는 조잡한 기계도 있었고, 아리랑 표 혹은 향로 표  성냥 통이 늘 놓여 있었는데, 그 조잡한 기계를 해킹? 해서 동전 안 넣고 운세를 뽑아보는 법이 친구들 사이에서 공유되기도 했다.  성냥 통에서 쏟아 놓은 수북한 성냥개비들은 탑 쌓기 놀이의 도구가 되어 죽돌이의 심심풀이에 매우 도움이 되는 도구이기도 했다. 그  옆에는 재떨이가 있었고 재떨이는 늘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있는 것이 정상이었다.


당시의  커피는 인스턴트 가루 커피에 적당량의 크림과 설탕을 넣어서 커피잔에 녹여다 주는 방식이었다. 몇몇?라고 묻는 레지 언니들에게  크림과 설탕의 양을 말해주면 손님들이 요구하는 취향에 맞춰 주방에서 조제해서(?) 져오는 방식이었다. 취향 이래 봐야 크림과  설탕의 분량 조정인데 대부분이 티스푼으로 크림 둘 설탕 둘이고 간혹 둘 하나, 하나하나로 주문되는 경우도 있긴 했다.


크림  둘 설탕 둘이 들어간 과하게 단맛, 죽은 듯 살아나오는 은근한 쓴맛, 크림의 끈적이며 날카로움을 중화시켜 주는 몽글한 맛이  기묘하게 조합되어 도저히 저항하기 어려운 입맛을 만들어 버리는 다방커피였다. 죽돌이와 판돌이와 다방커피는 셋이 한 쌍으로 탄생된  용어이다. 그때 맛 들인 다방커피가 평생을 따라다니며 사람을 괴롭히는 커피 맛이 될 줄은 몰랐다.


그  이후로 대학을 입학하고 2년쯤 지난 시점이었을까. 시내 중심가에 커피전문점이라는 것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이름도 근사하게  '빈센트 ' '몽마르트' '은좌' '이니스프리' 등등이었다. LP 그득한 판돌이의 방은 사라졌고, 조잡한 리퀘스트 쪽지도  사라졌으며, 비트 강한 팝 음악보다는 낮은 소리의 클래식이 잔잔하게 흘러나왔으며, 싸구려 호마이카 테이블과 칙칙한 색의 합성섬유로  만들어진 곰팡내 나던 소파들은 사라졌다. 사라진 가구들의 자리를 채운 것은 그 당시 용어로 '끼깔나는' 혹은 '깔삼한'  것들이었다.


우리들은 이제 그 '커피전문점'에서 주로 모였으며, 그 당시로는 희한하게 보였던 사이펀이라는 커피 추출기와 원두커피, 비엔나커피, 아이리시 커피, 등등의 낯선 이름과 새로운 커피문화와 맛에 적응해가기 시작하는 한편.


사라진  판돌이들이 그립기도 했고. '껌딱딱 슬리퍼 질질' 하던 언니야들이 그립기도 했다. 그렇게 음악다방들은 점점 패권을 잃게 되고  생존을 위해 티켓다방으로 변신하고 부활을 시도했던 시기가 잠시 있었다. 아직도 읍 면 단위 시골에는 더러 있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원두커피 맛에 적응해갈까 하던 때 스틱커피가 짠! 하며 나타났고, 커피자판기가 등장했다. 다방커피의 빅뱅 시대가 신기술의 힘을  업고 도래한 것이었다. 사무실마다 스틱 커피가 넘쳐났고, 가는 곳마다 커피자판기가 24시간 대기 중이었다. 그 밀크커피 맛은 그  옛날의 다방커피의 맛. 꼭 그 맛이었다. 그렇게 다방커피는 나의 확고한 벗어날 수 없는 취향 되었다.


이제는  커피믹스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몇 번을 시도해 보았지만, 커피 둘+프림 둘+설탕 둘의 입맛은 온몸 세포 세포와 골수 골골에  깊수키 각인되어 웬만한 저항으로는 절대로 거역할 수 없는 입맛이 되어 버렸다. 아메리카노가 대세이니 아메리카노 맛도 충분히  적응하여 즐기며 생활한다. 커피를 하루 다섯 잔 정도 마시고 그중 두 잔은 꼭 달달쌉살끈적한 다방커피여야 한다.


진로  문제로 암울했던 고교 말기와 대학 초기 어둑한 음악다방과 그때의 음악들은 위로가 많이 되었었지. 암울하고 절망적이었던 것과는 달리 그 당시 나의 리퀘스트 넘버원은 'Cat Stevens의 Mornig has broken.' 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좀  아이러니한 상황이네. 오랜만에 'Cat Stevens의 Mornig has broken.'이나 찾아 들어야겠다.


사족

하루  죙일 죽돌이 놀이하고 있노라면 쉴 새 없이 마주쳐야 하는 사람이 구두닦이 아저씨들이었는데, 이 아저씨들의 구두닦이 권유는 무척  끈질기고 집요해서 도무지 쉽게 물려 쳐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경우는 강제로 벗기다시피 해서 가져가서는 구두만 닦아오는  것이 아니라 끈이 낡았다고, 뒤축이 닳았다고 마구 수선해오고선 터무니없는 수선료를 요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죽돌계의 요주  인물들이었다.


죽돌계의  골칫거리였던 구두 아자씨들을 친구 한 녀석이 한방에 물리치는 법을 펼쳤으니 "학생 구두 좀 닦아야겠는걸? 싸게 해줄 테니 광  한번 내봐…. 불광은 오래간다고…." " 안 닦아요" "에이 잘해줄게" "돈 없어요" 등등의 실랑이를 길게 하며 아저씨를 바짝  입맛들께 해놓고선 막판에 이빨을 다 드러내놓고 씨~익 웃으며 "이빨 안 닦은 지 3일 됐어요. 안 닦아요!" 주변에 있던 다른  손님들, 레지 언니들 모두 다 뒤집어지게 했던 녀석의 '이빨도 안 닦아요' 신공이다. 그 녀석 트럼펫을 잘 불었댔는데……. 지금은  세상에 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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