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먹은 일이 의외로 쉽게 끝날 때

by 모아줄리


30년 된 구축 아파트, 4년간 살았던 정든 집을 떠났다. 아직 실감이 안 난다. 시원섭섭하다. 이 집에서 아이들이 초등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었다. 나 자신을 돌아보아도 이 집에서 사는 순간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다.

그렇게 4년의 시간이 흘러, 이젠 남의 집 살이를 끝낼 수 있게 되었다. 내 나이 마흔하고 여섯에 말이다. 그렇게 드디어 꿈에 그리던 새집, 아니 '내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집을 내놓은 지 3개월 전, 이사하는 날이 다가오는데 집이 나가지 않았다. 여긴 구축 밭이라는 것 빼곤, 나름 학군도 나쁘진 않은 편이고 인프라도 참 잘 갖춰진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이 나가지 않는 이유는 있다. 집 상태가 엉망이다. 천장은 내려앉아 있고, 마룻바닥은 오래되어 들떠 가시가 갈라져 생긴다. 혹여 찔릴까 걱정돼 여기저기 덕지덕지 붙여놓은 테이프 자국들이 흉물스럽기까지 하다. 화장실 타일엔 금이 가있고 변기는 삭아 건들기만 해도 부서질 듯하다. 이런 집에 4년간 살며 난 주인에게 단 두 차례 전화했었다. 재계약할 때, 그리고 그렇게 버티던 변기 중 안방의 변기가 결국 삭아서 깨졌을 때 갈아달라고 했었다. 전기에 이상이 생기면 남편이 부품 사다 갈았고 등 기구 역시 내가 사서 갈아 끼웠다. 콘센트나 차단기도 다 우리가 갈았다. 이건 관리사무소에 부탁해 갈았었다. 두꺼비집 차단기를 갈고 나니 차단기 제조일이 94년인 걸 보고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그냥 내 선에서 가능한 건 아쉬운 소리 안 하고 살았다. 그런 집에 누가 들어오고 싶으랴. 부동산 사장님도 나도 안 나가는 이유를 아는데 주인만 모른다. 나는 만기일 날 이사를 나가겠다고 했다. 만기일은 4월 25일이었다. 그리고 24일 날 이사를 하고 신랑을 제외한 세대원만 전출을 하기로 했다. 날짜가 다가올수록 부동산 사장님과 나만 똥줄이 탄다. 남편이 안 되겠다 싶어서 전화를 했다. 나랑 이야기하는 것보단 그래도 남편이랑 이야기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역시나 예상대로다. 시간이 모자라다느니, 집이 딸아이 명의라 대출받기도 힘들다는 둥, 법적으로 어쩌고저쩌고 막무가내다. 예상했던 일이다. 난 분명히 3개월보다 더 일찍 고지했고 그들도 알겠다고 했다.


이런 사태를 예상했던 우리는 보증금을 빼서 새집 잔금에 보태는 걸 예시당초 포기했었다. 다행히 우리는 3월에 새 아파트 잔금을 치렀고 키 불출을 해놓은 상태였다. 그래서 그걸 받는 게 당장 급한 건 아니었다. 또 전세보증금에는 전세자금 대출이 끼어있었고 그걸 제외한 순수한 내 보증금이 뭐 엄청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내 돈이니 제때 받았으면 하는 맘은 당연하다. 그래야 맘이 편하다. 그런데 주인이 이렇게 나온다. 집이 빠져야 준다고.. 그래서 남편이 물었다.
"저희 돈은 그렇다 치고 은행돈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주인은 당황스러워했다. 몰랐나 보다. 주인은 우리 아파트만 세 채나 있다. 그러니 뭐 헷갈렸을 수도 있다. 전부 우리 돈이면 떼 좀 부리려 했는데 은행돈은 그럴 수 없겠는지 알겠다고 전화를 끊는다.


그렇게 또 며칠이 흐른다. 다시 전화를 했더니 거드름을 피운다. 집 상태를 보고 준단다. 사실 4년 전 집을 구할 때 누군가 살고 있었다. 급한 맘에 상태를 꼼꼼히 못 봤다. 거실 바닥에도 메트가 깔아있길래 세입자에게 중간 소음이 심하냐 물었더니 아니라며 배시시 웃기만 했었다. 지금 생각하니 아마 마룻바닥에 가시가 일어나 위험해서 그랬던 것 같다. 더군다나 그 집이 아침에 이사 나가고 오후에 우리가 들어가는 당일치기 이사여서 집 상태를 제대로 알고 수리를 요구할 시간도 없었다. 걱정이 되었다. 이 모든 집 상태를 우리 때문이라고 박박 우기면 어쩌지? 이 주인도 내가 들어오기 직전에 이 집을 갭투자해서 산 것 같았다. 그래서 정확히 집 상태를 모를 수도 있었다. 억울해 질까 봐 걱정이 된다. 원래 그런 건데 내가 그랬다고 하면 어쩌지? 이럴 줄 알았으면 사는 동안 징징거리기라도 하며 고쳐달라 떼라도 쓸걸. 너무 얌전히 살았나 싶었다.


며칠간 혼자 머릿속에 그들의 반응에 대한 대처 방법을 생각해 보고 맞받아칠 대사까지 고민했다. 일단 내가 '을'이니 숙이고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미친년 모드로 갈까? 어떤 모드가 저들에게 먹힐 것인가. 보아하니 그렇게 똘똘한 사람들은 아니다. 일단 차분히 얘기자. 그러다 비상식적으로 나오면 나도 드러눕자. 4년 전 이 집을 중개한 부동산 과장님께 전화해 사정을 이야기하고 혹시 그때 찍어둔 사진이 없냐고 물어봤다. 찍어는 뒀지만 나한테 보내고 삭제했단다. 그 사진이 여태 나에게 있을 리는 만무하다. 역시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보증보험도 미리 알아본다. 또 나 같은 사례 있나 찾아보고 대책법도 메모했다. 남편도 알아보다 도움 될 만한 정보를 보내준다. 백방으로 싸울 준비를 마쳤다. ​​'그래, 덤벼라!' 그렇게 계약만료일이 되어 그들을 만났다. 남편은 일을 하니 내가 대신 갔다. 남편은 상황 이상하게 흐르면 오전 근무만 하고 갈 테니 걱정 말란다. 전장에 나가는 군인처럼 떨린다. 총탄은 준비했으나 내가 쏠 수 있을지..

​난 하난데 거긴 셋이다. 이 집의 서류상 주인인 20대 초반의 어린 딸과 실제 주인인 그녀의 엄마 아빠다. 일단 인사를 했다. 말도 걸었다. 당연히 곱지 않다. 주인 왈, 도배랑 장판은 할 건데 다른 기물이 파손됐는지는 봐야겠단다. 그 얘길 들으니 황당했다.
"무슨 기물요? 사장님~ 제가 생색 좀 내자면... 저희 모든 방 전등 거실 등 제가 다 갈고 30년 된 차단기부터 전기 관련 이상들 저희가 해결했어요. 이 집 지금 당장 불나도 이상할 게 없는 집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마룻바닥에 일어난 가시 때문에 애들도 몇 번 다쳤어요. 저희가 곧 입주니 참고 살았지 다른 세입자 같으면 다 고쳐달라 했을걸요?"
일단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아.. 욕하고 싶다.. 참자.. 아직 돈 못 받았다.' 하며 속을 꾹 눌렀다.
"일단 가보죠."그렇게 그들 3명과 나는 살던 집으로 향했다. 마침 바닥 장판 견적 내러 온 업자가 주인과 반갑게 인사하고 함께 올라간다. 일단 쪽수에서 밀리는 것 같아 주눅이 든다. 그럴수록 여유롭고 당당한 척하자. 애써 자연스러운 척한다. 여기저기를 업자와 함께 둘러본다. 바닥이 봉긋이 솟아 그곳에 가구조차 둘 수 없었던 아이방바닥의 장판을 뜯으니 콘크리트가 금이 가 있고 습하다. 업자는 심각하단 듯이 말한다.

"첨부터 잘못 공사를 했네. 안방 화장실 깨진 타일 사이로 물이 이방으로 조금씩 들어왔어요. 그래서 부푼 거야."

물 찬 것 마냥 주저앉은 거실천장을 보더니..
"에구... 천장은 댄조도 다 다시 해야 해."
가장 심각한 거실 마룻바닥은 언급조차 안 한다.
"마룻바닥은 에구..."
금 간 타일로 물이 들어가면 아래층에 물이 샌다 하여 내가 임시방편으로 덕지덕지 붙여놓은 테이프를 보더니 "화장실 벽타일도 다 깨져있네..."
업자의 한숨이 끝나자 남자 주인아저씨가 날 바라보더니 넙죽 한마디 날린다.
"사모님 감사합니다.." 엥? 비꼬는 건가 싶었다.
"이 정도인 줄 몰랐습니다. 살아주셔서 감사하네요."
끝인 거야? 나 열심히 준비했는데 이렇게 싱겁게 기권승 하는 거야?

돌아오는 길 나한테 말을 거는 그 집 사람들. 아까 집 보러 갈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이다. 자기들도 이 집을 살 때 우리 직전에 살던 사람들의 짐이 있는 상태를 보고 집을 산 거라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단다.

​그렇게 보증금을 받았다. 우리가 나간 그 집은 화장실 두 군데 다 공사하고 천장 등 기구 싹 다시 하고 바닥 다시 깔고 싱크대와 수납장도 다시 한단다. 전기공사도 다 한단다. 그리고 월세로 돌려 다른 곳보다 좀 더 비싸게 받겠다 한다.​​
'그건 알아서들 하시고~~~'
허무하기도 했지만 너무나 다행이었다. 준비 없이 한방 맞으면 아프다. 반대로 그것이 기우라 할지라도 만만의 준비를 한다. 그리고 한방 맞을 생각으로 눈 찔끔 감고 가슴 졸이며 펀치를 기다리는데... 안 때리니 이게 뭐야 싶다. 그래도 난 후자가 좋다.

돌아오는 길 신나서 남편에게 전화했다. 6천만 원이 생긴 기분이라고.. 이돈 당분간 내가 갖고 있어도 되냐 하니 그러란다.

누구에겐 적은 돈일지 모른다. 6천만 원.
이 돈은 흥청망청 살았을 때, 그나마 가까스로 만든 월세 보증금 2000만 원에서 또 다른 월세로 올 길 때 아등바등 1000만 원 보태 3000만이 되었고 전세를 오며 대출을 받았다. 그중 어쨌건 4800만 원이라는 내 돈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전세 재계약 시 5%를 올려주며 6000만 원 정도의 내 돈이 되었다. 어쩜 내가 지난 4년의 시간 역시도 전과 변함없이 흥청망청 쓰며 살았다면 어땠을까? 이 돈은 지난날처럼 우리 가족의 전 재산이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 대출이 껴있지만 내 집이 생겼고 이 돈은 나의 전 재산이 아닌 여윳돈이라는 거.. 이건 정말 하늘과 땅 차이니까. 작은 변화에서 시작된 내 인생의 어마어마한 변화이다.

사실 이 돈이 들어오자 잠재된 본능이 꿈틀거렸다. 남편의 차. 곰만 한 사람이 모닝똥차에 몸을 구겨 넣는 모습이 짠해 보였다. 대리 불렀는데 가끔 덩치 큰 대리기사가 오면 서로 어깨가 붙는다던 남편의 말도 생각이 난다. 차 사주고 싶었다. 새 차 사서 건설현장 끌고 다니면 흠집 날까 신경 쓰인다고 똥차모닝 막 모는 게 편하다고 했지만 맘이 쓰였다. 남편 차 바꿔주고 싶다으~~~
하지만 꾹 참았다. 지금 급한 건 차가 아니다. 대출금 상환과 내 돈을 불려야 한다. 다시금 맘을 가다듬고 4년 전 절약패치 붙이고 살았듯 다시 한번 살아 디주택자 꼬리 한번 달아보자. 누가 알아? 인생은 오늘처럼 의외로 쉽게 풀릴 수도 있다. 다만 열심히 준비한 자에게만 오는 기회일 것이라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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