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사진관을 합니다만, 03
두 아들과 딸이 아버지를 부축하고 사진관으로 들어온다. 한 장의 사진보다 한 때의 시간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그리고 이 시간을 통해 돌아볼 수 있도록, 사진관은 질문이 많다. 빛 좋은 곳에 앉아서 아버님께 묻는다.
아버님,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내가 33년 생이예요. 그런데 호적에는 36년 1월 25일로 올렸어요. 그때는 그랬어요. 내가 나이가 들어서 말이 시원찮아요. 옛날엔 안 그랬는데 이제 그렇습니다. 미안합니다.
아버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가끔 엉뚱한 이야기를 하신다고 한다. 당신도 그런 자신을 안다는 듯, 이야기에 앞서 양해를 구하신다. 문장의 끝까지 또박또박 말하는 모습에서 의식을 붙잡는 그의 노력이 드러난다. 두 아들과 딸은 한편으로 아버지를 부축하고 한편으로 아버지의 말에 살을 보탠다. 큰아들에게 어릴 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물었다.
아버지는 해외에서 배를 타셨어요. 그래서 1년에 한 번쯤 집에 오시고는 하셨죠. 아무래도 아들의 애정과 딸의 애정은 느낌이 좀 다르죠. 저도 어렸을 땐 집 밖으로 돌아다니기 바빴으니까요. 어렸을 때 방학 때면 아버지 배 타고 연안을 따라다녔던 기억은 나요. 너도 있었지 않냐?
이야기는 딸에게 넘어간다.
나도 방학 때 아빠 배 탔던 기억은 나요. 한 번은 바다 가운데였는데 아빠가 나를 바다에 빠트린 적이 있었어요. 나는 수영을 못 했는데, 그때 아빠랑 기관장 아저씨랑 선원분들이 함께 막 웃으셨어요. 그러니까 나는 물에 빠지긴 했지만 ‘이게 위험한 상황은 아니다. 나는 안전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무섭진 않았다는 기억이 있어요.
막내는 조금 다르다. 해외를 다니시던 아버지는 막내가 대학생일 무렵부터 한반도의 물길을 주로 다니셨다. 그래서 어릴 때 기억 중 대부분은 엄마가 차지한다. 다만 막내니까, 용돈을 참 많이 주셨던 아버지의 기억은 선명하다.
아버지는 글쓰기를 즐기셔서 끊임없이 편지를 적어 보내셨다. 당신의 아내에게는 연애편지 같은 애정의 편지를 계속 썼고, 한참 자라는 딸 단속도 이틀에 한 번 꼴로 보내는 편지로 대신했다. 딸은 쓸 말도 없는데 매번 써야 하는 답장이 늘 힘겨워서 편지 받는 일이 버거웠다고 한다. 땅에 발 디디고 사는 딸은 더 적을 말이 없는데, 반복되는 수평선만 보았을 아버지는 무슨 하실 말씀이 날마다 새롭고 끝없었을까? 아버지는 세상의 바다를 떠도는 선장 생활을 마치며 그동안 받았던 편지를 모두 갖고 오셨다. 그리고는 그동안 당신이 쓰셨던 편지를 따로 모아 놓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참 서운해하셨다고 한다. 딸의 말이다.
세 남매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동안 아버지는 조는 듯 고개를 숙이고 햇볕 아래 가만 앉아 있다. 2015년에 아내가 죽은 후 그는 조금씩 기력을 잃었다. 몸의 기력은 마음의 기력이기도 했던 것일까. 그는 치매 초기를 앓고 있다. 최근의 일부터, 먼 사람부터 하나씩 잊어간다. 그래서 아버지의 기억 중에 생생한 것은 지난 바다 위의 풍경이고, 세 자녀의 이름이다.
의자에 아버지를 앉히고 조명과 카메라를 맞추고, 리모컨을 넘겼다. 매일 보아서 더 이상 낯설게 없다 싶은 얼굴도 카메라 뷰파인더 안에 들어가면 새삼스러운 얼굴이 된다. 부모님을 조금 다른 거리에서 바라보기. 이번 이벤트에서 의도한 것이다. 아버지의 포즈를 고치며 세 자녀가 돌아가며 리모컨을 잡는다. 카메라는 넘겼으니 나는 계속 묻는다.
아버님,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다른 일을 해 볼 수 있다면 어떤 걸 하시겠어요?
모자 쓰는 일.
아니, 아빠. 어떤 직업을 갖고 싶냐고?
아빠가 질문을 잘 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한 딸이 말을 고쳐 물었다. 그는 손을 들어 쓰고 있는 모자를 가리키며 힘주어 다시 말했다.
이 모자 쓸 거야.
세상을 항해하는 선장의 모자. 아버지의 뜻은 확고했다. 다시 젊어지고 다시 직업을 가질 수 있다면 다시 이 모자를 쓰고 바다로 나갈 거다. 그는 도대체 바다의 무엇이, 바다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을까?
그럼 다시 배를 타시면 어디를 가 보고 싶으세요?
여기저기. 안 가 본 데 다 가고 싶어. 너하고 안 가 본 데.
영국 여자에게 모자도 선물 받고 소련 여자에게 손톱깎기도 선물 받으며 잘 나가던 선장은 이제는 고개도 들기 힘든 기력으로, 여전히 바다가 좋다고, 시원해서 좋다고 말한다. 그리고 너, 딸과 함께 못 가 본 온갖 곳을 가고 싶다.
여전히 아들, 딸이지만 이제 큰아들 나이도 환갑이다. 맞잡은 네 명의 손은 다 같이 주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