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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비 Sep 28. 2022

섬을 돌아가는 출장길



1

섬 서쪽 끝에서 약속이 잡혔다. 아침 해를 등지고 차를 몬다. 시가지로 들어가는 일정만 아니라면 어디든 시간은 넉넉하게 나선다. 길을 잃을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비게이션은 편하다. 절대 당신을 버리지 않는다. 믿어도 좋다. 안전하게 당신을 목적지까지 바래다 줄 거다. 앞서가는 차를 쫓고, 뒤따라오는 차에 방해되지 않도록 흐름에 맞추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다. 그런데, 그러면 출발지와 목적지만 남고 여정은 사라진다. 다른 방법도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내비게이션을 나침반 대용으로 쓰고, 목적지가 있는 방향으로 온갖 골목길과 좁은 샛길을 따라갈 수 있다. 제주의 길은 생각보다 촘촘해서 대부분 작은 길도 어디로든 이어지고 있다. 막다른 길이면 어떤가? 잠시 돌아 나와서 다른 길을 가면 그만이다. 안심해도 좋다. 잘 못 가본들 어디를 가겠는가. 여기는 섬이다.


2

잡지 촬영을 마치고 편집자와 함께 근처 바다에 갔다. 미리 챙겨간 낚싯대와 근처 낚시점에서 산 미끼 한 통을 사이에 놓고 모슬포 방파제 내항에 같이 앉았다. 다음 작업과 촬영 콘셉트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왜 전갱이는 물지 않는가? 저쪽으로 자리를 옮겨야 하는가? 이야기한다. 두 개의 다른 이야기는 날실과 씨실 같아서 어느 하나 건너뛰지 않고 서로를 잇대고 겹친다. 적당한 동풍이 분다. 해 넘어간다. 그래, 이래야 제주답지. 물론 아내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촬영 일정은 순조롭게 마쳤고, 미팅도 분명히 했다. 귀가시간이 조금 늦어졌을 뿐. 

낚시는 실패했다. 만만한 게 아니니까. 미팅도 실패했다. 이야기는 겉돌았다. 그런데 어쩐지 성공한 하루 같다.


3

여름 오후는 바다에서 놀았다. 검은 현무암 바위에 파도가 부딪쳐서 깨진다. 바람이 물의 몸을 입고 와서 온몸을 던진다. 발이 닿지 않는, 검푸른 윤곽의 바닥만 흐릿하게 보이는 곳에 가서 자맥질하며 일몰 때를 보낸다. 어쩌다가 호흡이라도 엉키면 온몸을 바둥거려도 떠 있기 바쁘다. 허우적거리다가 겨우 바위에 닿는다. 어쩌면 한 계절 생활이 허우적거림이었을 수 있겠다. 하루하루가 바쁘니까, 뭐든 하고 있으니까 이 분주한 날들이 쌓이면 제법 괜찮은 결과물이 될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매일 바쁜데 왜 달라지는 것이 없나 답답하고 궁금했다. 어쩌면 헤엄쳐 나아가야 할 상황에서 괜히 바둥거리고만 있었나. 그렇게 내 한 철이 지나는 건가. 


4

풍경은 어김없다. 여름밤 구엄포구에 가면 먼바다는 한치잡이 배가 밝히는 가스등으로 가득 차 있다. 폭발하는 항성들의 우주를 바다에 내려놓은 것 같다. 방파제에는 검은 그림자들이 던지는 초록과 붉은색의 한치잡이 찌 조명이 연신 포물선을 그린다. 태풍이 지난 하늘에서 구름은 말갛게 씻긴 하늘을 온 가득 채우며 흐른다. 멀고 높은 곳의 구름은 크고 사나운데 멈춘 듯하고, 그보다 가까운 구름은 제각각의 모습으로 지나간 바람을 쫓아가듯 빨리 흘러간다. 서로 다른 속도의 구름이 만드는 하늘은 어떤 것은 배경 같고, 또 어떤 구름은 말 많은 등장인물이어서 한참 진행 중인 연극 무대 같다. 천아오름을 지나는 한라산 둘레길은 겨우 사람 다니는 길만 남겨놓고 온통 초록이다. 그 길에 카메라를 들이밀면 화면 가득 초록이 번진다. 촉촉한 흙이 깔린 길바닥을 찍어도, 나무 사이로 언뜻 비치는 계곡을 찍어도, 나무통을 잔뜩 세워놓은 표고버섯 재배장을 찍어도 화면은 초록이다. 나뭇잎을 피해 찍어도 숲 가득 들어찬 초록은 사진에 가득하다. 그러나, 풍경은 두 번 없다. 빛과 바람은 한순간도 같은 것이 없어서 시시각각 변하는 두 요소의 조합은 한 번도 같은 적 없다. 그리고 풍경을 바라보는 나도 변한다. 변수의 조합은 변화무쌍해서 같은 계절에 같은 장소에 있어도 풍경은 사뭇 다르고 지난번 본 것과 똑같은 것을 보려는 노력은 구차해진다. 그래서 모든 기록은 철 지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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