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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비 Sep 28. 2022

몸에 새긴 시간을 찍는 법


사진 전시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왔다. 4미터 길이 현수막으로 크게 뽑고 8미터 천장에 높이 걸어서 인물사진의 터널을 만든 작업이었다. 그 느낌이 마음에 든다고, 그런 인상으로 바디 프로필을 찍고 싶다는 문의였다. 제주에서 따로 바디 프로필 작업을 한 적은 없었으니까, 예전에 찍었던 클라이머의 사진과 언더웨어 사진, 한국에서 잠시 찍었던 바디 프로필 사진 몇 장을 포트폴리오로 준비하고, 요즘 바디 프로필 트렌드는 어떤 것인지 찾아보면서 미팅을 준비했다. 

시간을 들여 단련한 몸은 언제나 매력적인 피사체다. 사진의 표면에는 소리도 없고 서사도 없다. 고요한 찰나의 순간만 담을 수 수 있는 것이 사진 매체의 특징이다. 하지만 한 분야에 오래 머물고 애쓴 몸이 사진 속에 등장할 때, 그 몸에는 시간의 서사가 오롯이 새겨져 있고, 신체가 만드는 표정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빛을 오래 다룬 사진사는 그런 몸을 갖지 못했지만 그 대신 그들이 몸에 들인 시간과 노력만큼 그 몸 위에 빛을 입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익혀 왔다. 잘 보여주는 법은 내 몫이다.

개인작업으로 찍었던 클라이머는 내가 운동하던 곳에서 놀이처럼 했던 작업이다. 닿지 않는 거리와 잡을 수 없는 크기에 도전하는 클라이머의 등은 사납게 불끈댄다. 뒤에 앉아서 그 모습을 보면서 어떤 빛이 저 질감을 도드라지게 도울 수 있을까 생각했다. 자세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렇게 몇 장의 클라이머 사진이 남았다.

그리고 제주에 온 직후에, 제주를 배경으로 한 포트폴리오가 필요할 것 같아서 찍었던 사진도 있다. 주인공은 무용가. 겨울이었고, 추운 새벽이었다. 장면을 고르고 조명을 맞춘 후 신호를 보냈을 때 무용가는 두꺼운 외투를 벗고 등을 드러냈다. 군더더기라고는 없는 몸, 그 위를 가득 채운 오로지 동작을 위한 근육들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그동안 최고라고 생각했던 클라이머의 등을 수줍게 만들어 버렸다.


바디프로필을 의뢰한 모델은 직업 트레이너였고, 이제 50이 되는 나이니까 요즘 트렌드처럼 과한 섹시코드는 싫다고 했다. 자신에게 약속처럼, 증명처럼, 선물처럼 찍고 싶다고 했다. 무난히 이야기를 마쳤다. 거기까지는 다른 촬영과 다를 것이 없었는데, 며칠 뒤에 우연히 본 모델의 SNS에 당황했다. 촬영 예정일까지 남은 날짜를 계산해서 적어놓고 몸을 만드는 각오가 적혀 있었다. 운동과 식단, 결심으로 채워진 그의 포스트는 며칠마다 이어졌다. 날짜가 하루씩 줄어드는 만큼 그의 각오는 더해지는 것 같았고, 짧은 글 속에서 꾹 다문 입술이 보이는 것 같았다.


큰일 났다. 저 사람은 그 하루를 위해 이렇게 공을 들이고 있구나.


마음에 부담이 쌓이기 시작했다. 긴 시간 공들여 준비해 온 몸을 만약에 내가 잘 못 찍어버리면 어떡하나. 좀 더 많은 샘플 이미지를 찾아보고 발생 가능한 모든 상황을 그려보려고 애썼다. 촬영은 순조롭게 끝났고, 그날 모델의 SNS에는 이제 다 끝났다는 후련한 포스트가 올라왔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발레를 배우는 분에게서 문의가 왔다. 함께 배우는 사람들과 발레 포징 사진을 남겨놓고 싶다고 했다. 서귀포 쪽에 있는 발레학원에 가서 준비해 간 샘플 이미지들을 보여주고 그들의 의견을 들었다. 그날 이후로 모델들의 본격적인 준비가 시작됐고, 제법 긴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날짜가 정해졌다.

여덟 명의 모델과 발레 선생님, 촬영을 도와주기 위해 온 분들까지. 오랜만에 사진관이 꽉 찬다. 오늘 촬영을 위해 많은 준비를 했을 사람들은 소풍 오는 기분으로 모인 아이들처럼 신나서, 종일 이어진 촬영 동안 사진관은 왁자지껄한 파티장 같다. 함께 지켜보며 서로의 포즈에 조언을 보태고, 모니터에 뜨는 사진들을 보며 감탄하기도 하고 민망하다며 웃는다. 

인체가 만드는 선은 참 예쁜데, 그중에서도 무용만큼 사람의 선을 잘 보여주는 것도 드물다. 바디 프로필이 근육의 질감 하나까지 강조하는 빛이었다면, 발레 이미지는 전체적으로 몽환적으로 보이도록 크고 부드러운 빛을 만들었다. 사진은 제한된 화면 안에 가능한 한 풍성한 이야기를 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모델이 고개를 꺾는 각도나 시선의 높이, 손가락 하나의 위치에 따라서도 전체 느낌이 달라진다. 하지만 전문 모델이 아니면 카메라 앞에서 마음껏 자신을 표현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얼굴 표정 하나 만드는 것도 어려운데 하물며 몸이야 말해 무엇할까. 무용은 몸의 사용법에 가장 충실하다. 갈고닦아 훈련된 몸은 근육 하나 관절 하나가 모두 나름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전체 이야기가 풍성해진다. 그래서 카메라 앞에서 표현력이 2% 부족한 사람들에게 춤을 배워보라고 권한다. 물론 나는 춤을 못 추지만, 몸의 언어로 가장 작은 단위까지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춤인 것 같기 때문이다.

레오타드를 입고 토슈즈를 신은 모델들이 한 명씩 자신이 준비해 온 포즈를 잡았다. 발레는 작은 동작의 차이가 큰 완성도의 차이여서, 이쪽에 문외한인 내가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코치님은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동작을 잡아주며 분주했다. 최종 사진을 고를 때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 사진을 주고 받기도 하고 같이 모니터를 보면서 나는 사진적인 완성도를 살피고 코치는 동작의 완성도를 따져 최종 사진을 선택했다. 

그들이 들인 시간과 노력의 얼마만큼이나 나는 담아낸 것일까. 바디 프로필은 올 겨울에, 발레는 내년에 또 찍기로 했다. 매력적인 몸의 이야기는 아직 안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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