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를 위한 포트레이트 촬영의 콘셉트는 주로 중장년에 맞춰져 있어서 비교적 나이 든 모델들이 많다. 그래서 대부분의 모델은 본인들이 그렇다는 생각을 안 할 뿐, 경험치 만랩의 인생 고수들이다. 나는 사진관에 가만 앉아서 아직 내가 살아보지 못한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온 분들께 질문을 쏟아내며 매번 다른 인생을 간접 경험한다. 감동하고, 탄식하고, 공감하며 배운다.
오랜만에 20대 모델이 왔다. 학생이고, 휴학 중이다. 지난 2주간 제주를 혼자 여행했고, 오늘 촬영이 끝나면 오후 배를 타고 그가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 제주 일정의 마지막으로 사진관을 찾아준 것이 고맙고 무엇인지 몰라도 내가 꼭 물어봐야 할 것이 있을 것만 같다. 우리는 세 가지 다른 표정을 찍기로 했다.
모델이 들어오면 우선은 테이블에서 차 한 잔 권하며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눈다. 이야기하는 동안 그의 동작과 표정을 살피며 잠시 후 어떤 자세로 앉힐지, 어떤 표정과 각도가 어울리는지 살핀다. 그리고 그 각도에 어울리는 빛도 함께 고민한다. 어떤 버릇이 있는지, 잘 쓰는 손동작은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할 때는 어디를 보는지, 우리가 놓치는 어떤 표정이 있는지 관찰한다. 작은 질문에 대한 답은 새로운 질문의 꼬리를 물고 있어서, 대화가 이어질수록 그 사람에게만 물을 수 있는 것들이 생겨난다.
최근에 당신을 설레게 만들었던 일은 무엇인가?
당신을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에게 한 장의 사진으로 인사해야 한다면,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가?
어떤 표정이 가장 당신다운 얼굴인가?
그때는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큰 갈림길이었던 그 순간은 언제였나?
사람마다 생김새가 다른 것처럼 얼굴은 그마다 다른 질문을 품고 있다. 모델들은 대부분의 질문에 내가 생각도 해보지 못한 방식으로 대답하며 그들이 지나온 세상을 알려 준다.
말하는 문장의 마침표까지 명확하게 발음하는 그는 단단하고, 성실하고, 열정적인 시간을 살아온 것 같다. 당신의 지난 시간을 반추하고 위로하고 응원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모델. 또래들이 선망할 것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 듯 보이는 그에게 부족함이란 좀처럼 없어 보인다. 다만 아직 경험하지 못한 시간은 그에게도 어쩔 수 없다. 어떤 책을 통해서도, 어떤 타인의 조언을 통해서도 쌓기 어려운 것 중에 하나는 자신의 몸으로 직접 겪어야 하는 실패의 경험치 같은 것들이다. 궁금해졌다.
어때요? 한 오 년쯤으로 할까요? 다른 어떤 제한도 없다고 하죠. 5년의 경험치를 얻을 수 있다면, 어떤 걸 경험하고 싶어요?
잠시 생각한 후 그는 그 다운 단호한 문장으로 말했다.
음, 지식적인 측면에 쓰고 싶지는 않아요. 그건 제가 쌓아 나가야 할 측면일 것 같고요. 5년 간의 경험치가 생긴다면, 소중한 사람한테 상처 입히지 않는 법, 소중하게 대할 줄 아는 방법을 배웠으면 좋겠어요.
어떤 시간을 경험하면 소중한 사람을 소중하게 대할 수 있는 경험이 쌓일까? 사진을 찍어야 해서, 그의 출항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아서 우리의 대화는 결론까지 가지 못하고 끝났다. 우리는 직업 모델이 아니니까, 포즈를 만들기보다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훨씬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촬영은 그와 나눈 이야기들의 연장선에서 이어진다. 모델도 카메라도 겨우 몸이 좀 풀릴 것 같은데 어느새 마칠 시간이다. 한 사람과 공감하는데 한 시간은 너무 짧다. 그가 돌아간 후 여운이 길게 남았다. 맞다, 20대의 시간은 찬란하구나. 새삼스러운 결론도 다시 떠올랐다. 맞다, 사랑은 인생의 목적이다. 결국 사진관의 모든 질문은 내게 묻는 것이고 내가 구하는 것 역시 나에게 들려주고 싶은 답이다.
저녁 무렵 모니터에서 그의 표정 세 장을 드디어 골라냈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 사진도 있는데, 어떤 표정은 얼굴보다 그의 어깨와 손끝에 보이기도 한다. 당신의 빛나는 이 시간이, 이 표정 속에 잘 담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