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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비 Jun 07. 2024

지구생물체는 항복하라

찌낚시를 시작한 너에게,



마루야. 아빠와 엄마는 펜션 오픈 준비로 하루 종일 분주했다. 낮동안 내내 마무리 일을 하고, 밤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추가로 주문해야 할 것들을 쇼핑 장바구니에 담았다. 이렇게 시작하는 이유는, 그래서 너무 피곤하다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정리는 다음번에 다시 하기로 하고 간단하게 적어두는 걸 이해해 줘.


이야기꾼의 조건 중에 아빠가 높이 치는 한 가지는 천연덕스러움이란다. 있었던 이야기를 생생하게 생명력을 불어넣어 가며 말하는 사람도 있고, 없었던 이야기를 마치 실재했던 사건인 것처럼 살을 붙여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아빠가 좋아하는 이야기꾼의 부류는 현실과 환상의 사이를 교묘하게 오가며 천연덕스럽게 이야기를 엮어내는 사람들이다.


나중에 따로 소개하겠지만, 박민규라는 소설가가 쓴 책들은 네게 권할 만하다. 그다음에는 천병관이라는 소설가가 쓴 “고래”라는 멋진 소설도 있단다.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제한하지 않는다면 장진이라는 영화감독도 좋단다. 박민규와 천병관의 소설, 장진의 시나리오집도 책장에 있으니 나중에 그 책 이야기를 할 때가 되면 자세히 적어 두는 걸로 하자. 지금은 밤이 늦었고 너무 피곤해. 쑤퉁이라는 중국작가가 쓴 “나, 제왕의 생애”라는 책도 비슷한 결이다. 이런 부류의 책들은 우선 재미있단다. 그리고 마치 내 주변에 정말 이런 낯설고 신선한 차원의 사건들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만들지. 마치 해리포터가 다니는 9와 3/4 승강장처럼 말이야. 지금 네가 일고 있는 책을 마치면 박민규의 책을 슬쩍 건네 볼까? 아니다, 너 “1984년” 먼저 읽기로 했는데 말이야. 하지만 1984년보다는 “핑퐁”이 훨씬 더 네 취향에 맞을 것 같아.


이 책은 지난번 서울 출장길에 오랜만에 서점에 들러서 사 온 책이다. 힘든 촬영을 마치고 잠도 제대로 못 잔 상황에서 서점을 차곡차곡 둘러볼 체력은 없었어. 온라인에서 알게 된, 일면식도 없는 독서가의 추천을 받고 메모해 두었던 책이어서 주저 없이 집어들 수 있었다. 과연 재미있어서, 비행기가 제주에 도착할 때쯤엔 벌써 절반도 더 읽었더랬다. 이런 천연덕스러움이라니! 반갑기 그지없는 이야기들이었단다.


너는 얼마 전부터 찌낚시를 배우기 시작했지. 이 책에는 바다에 사는 여러 생물들이 주인공으로 나온단다. 문어, 상어, 개복치, 해파리, 고래까지. 하나하나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지만, 알지? 아빠 오늘은 이만 자야겠다. 사실 자기 전에 마무리해야 할 작업도 아직 남았고 내일은 아침부터 수업도 있어. 그 준비는 새벽에 해야겠다. 다음 주에는 꼭 시간 내서 일몰의 바다에 가자. 대어를 낚을 꿈을 꾸며 같이 멀리까지 찌를 던지자. 혹시 아니? 문어 한 마리가 바늘을 붙들고 올라와서 우리를 보며 외칠지.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아, 아빠는 문어는 숙회가 맛있더라. 너는 문어 별로 안 좋아하지만.




지구생물체는 항복하라 / 정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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