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연기가 성공적으로 끝나 그 길로 모비는 나미의 손을 잡고 외가댁에 갔다. 기차 안에서 진성이 자기 없이도 잠을 잘 잘 수 있을지 걱정했다.
외할머니댁은 2층 주택들이 마주 보고 일렬로 뻗은 골목에 있었는데, 사거리 맨 처음 집을 제외하고는 다 살림살이가 비슷해 보이는 정다운 동네였다. 대문을 열고 계단을 두어 개 오르면 1층에 출입문이 있고, 신발을 벗은 뒤 계단을 더 올라가서 문을 하나 더 열면 가족들이 사용하는 실내공간이 나왔다. 신발을 벗은 뒤 오르는 그 계단은 주황색 장판에 갈색 선으로 화려한 무늬가 그려져 있고, 벽에는 스킬 자수의 큰 호랑이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모비는 호랑이와 마주 보고 앉아 종이 인형놀이 하는 것을 좋아했다. 조금이라도 딴생각을 하면 인형 옷 거는 흰 부분까지 잘라버리거나 인형의 목이 덜렁거리게 되므로 최대한 집중하여 가위질했다. 그게 지겨워지면 마당에 내려가 분꽃 열매를 갈라 흰 분말을 비비며 놀거나 동네에 한 번씩 오는 트럭에서 흔들 목마를 탔다.
모비는 더 이상 유치원을 다니지 않았지만 할머니와 나미 보살핌 속에 점점 7살 다운 쾌활함을 찾아갔다. 가끔 이모들이 모비를 보러 할머니댁에 왔는데, 서울 말씨가 어쩌나 사근사근하던지 사납고 무서운 고모들과는 달랐다. 그런 이모와 외할머니 앞에서 모비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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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는 노래를 멈추고 다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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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우리 엄마가.
다정하신 모습으로
한 손에는 크레파스를 사가시고 오셨어요- 음, 음
그릴 것은 너무 많은데 하얀 종이가 너무 작아서
엄마 얼굴 그리고 나니 잠이 들고 말았어요, 음.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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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는 아빠가 나오는 모든 동요는 잽싸게 엄마로 바꾸어 불렀다. 이모들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모비는 자신이 나미의 외모를 더 닮아서 다행이라 여겼다.
안타깝게도 진성을 더 닮은 모비의 여동생은 고모네를 오갔다. 둘째 고모는 코 옆에 심술 나 보이는 왕점이 있었고 언제나 껌을 소리 나게 씹었다. 손에는 금반지와 금팔찌가 여러 개 있었는데 이는 고모부가 성실하게 일한 덕이었다. 고모는 항상 한쪽 무릎은 세우고, 한쪽 다리는 양반다리를 해서 원피스 끝자락을 여며 팬티가 안 보이게 잘도 앉았다. 주로 방에서 담배를 폈고, 에어로빅을 했고, 화투판에 다녔다. 모비 동생은 담배 연기 가득한 안방에서 못생긴 슈나우저와 함께 있거나, 에어로빅장 맨 뒤에 앉아 있거나, 화투판을 따라가 동전이나 만지며 놀았다. 눈칫밥도 모르는 그 어린것이 밥투정을 하다가 고모에게 머리통을 맞은 후에는 아기가 없는 막내 고모네에 가서 인형이 됐다. 막내고모는 '아들 같이 눈이 크고 잘생겼네.'라며 동생의 머리를 남자애 같이 자르고 파마를 해준 뒤 멜빵바지를 입혔다. 찰칵. 찰칵. 웃어봐.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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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어른들은 멋대로 싸우고 멋대로 화해했다. 그래서 모비의 유치원 졸업식에는 나미, 진성, 머리가 어정쩡하게 긴 모비와 동생이 모두 참석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2층 양옥집에서 넷이 살았다. 외부 화장실을 없애고 내부 화장실을 만들었고 동백꽃 옆에 미니 넝쿨 장미를 심었다.
그러다 얼마 안 있어 그 집을 모두 허물고 3층 건물을 올렸다. 건물 전체 모양은 모서리 한쪽만 둥근 모습으로 작은 창문도 호를 그리며 배치됐다.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쪽은 모두 유리창문이었고 1층 난간과 옥상 난간은 연두색이었다. 외벽의 질감은 콘크리트가 노출된 느낌으로 여러 모로 굉장히 특이한 건물이었다.
1층은 호프집, 2층은 파르페를 파는 카페 겸 바(bar)로 세를 내어 주고 3층이 모비의 집이 됐다.
+그 시절 집을 지키던 호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