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알 수 없는
진성은 노력하지 않아도 물려받은 게 많았다. 큰 키, 긴 팔과 다리, 쌍꺼풀 없이도 큰 눈, 오뚝한 콧대, 흰 피부. 키가 크고 체격이 좋다는 이유로 야구를 시작했으나 훈련은 쉽지 않았다. 구타가 일상이었다. 못 견디고 그만뒀을 땐 이미 공부와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 덕에 군대도 안 갔고, 서울 대기업에 입사했다. 모비를 낳았다. 친구는 많았고 술은 먹어도 취하지 않았으며 단란주점 홀에서 흥 있게 노래 부를 줄 알았다. 그래도 남 밑에서 일하는 게 어디 쉬운가. 광주로 내려가 사업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미가 절대 내려가지 않겠다고 했다. 서울 사람들은 다 서울만 벗어나면 소 키우고 농사짓는 깡시골인 줄 안다. 나미를 설득할 방법이 없던 터에 진성은 딸 둘을 데리고 광주로 내려와 버렸다. 나미는 아이들과 떨어져 살 위인이 못 된다는 것을 진성은 알았다. 조금만 버티면 백기를 들고 아이를 보러 올 것이 분명했다. 그 사이 진성은 아버지의 지원으로 유통업 대리점 사장이 됐다. 술자리에 능했고 사람들을 잘 챙기는 성격 덕분에 영업이 잘 됐다. 이 바닥에 소질이 있는 듯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IMF 탓이었다. 부도가 났고 신용불량자가 됐고 3층 건물이 압류당했다. 모두들 힘내라고 했다. 진성의 탓이 아니라고 했다. 힘없는 국가에 태어난 게 잘못이라고 했다. 그러나 딱 한 사람. 당연히 자기를 위로해야 할 사람이 진성을 끝없이 비난했다. 나미였다. 진성은 진심으로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 평생 회복하지 못했다.
혼자가 된 진성은 아버지를 원망했다. 애초에 나이 차이가 많았던 아버지, 다정한 말 한마디 없이 무서웠던 아버지, 돈이 그렇게 많으면서도 자린고비였던 아버지, 장남에게만 유산을 잔뜩 남겨 남은 형재애를 모두 깨버린 아버지. 그러나 원망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번엔 새어머니를 원망해 본다. 자기가 낳은 큰 딸은 그 시절에도 억척스럽게 가르쳐 약대까지 보내더니만 배다른 자기 형제들에게는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으셨다. 되돌아보니 우리에게 잘해 준 것이 아니라 방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역시 소용이 없었다.
이제 큰 형을 원망한다. 그렇게 많은 재산을 몽땅 가져가더니, 잘 다니던 직장까지 내팽개치고 사업을 벌여 망하고, 또 망하고. 그러다가 황망하게 세상을 등진 형을.
돈이 없어지니 그 많던 친구들도 거래처 사장들도 곁에 남지 않았다. 냉정하고 잔인한 현실을 잊으려 술을 마셨으나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 끝에서야 진성은 깨달았다. 과거를 원망해 봤자 뭐 하나. 아무리 후회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는 것을.
다행히 진성은 아직 젊었고 체격과 체력이 좋았다. 다만 요령이 없어 자꾸 다쳤다. 하얗던 피부가 새까맣게 탔고, 정강이에는 아문 상처와 새로 난 상처가 어지럽게 자리 잡았다. 함바집에서 밥을 먹고 일당을 받고 남자들이 우글거리는 숙소에서 잤다. 막노동 인부에서 현장 외부 인부를 관리하는 자리로 가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진성은 무너지는 자신의 멘털을 부여잡고, 전쟁 같은 새 세상에서 자리 잡느라 아주 잠시 딸들에게 연락할 수 없었다. 진성은 딸들에게 떳떳했다. 처지를 비관하여 세상을 등지지 않고 아빠 자리를 지켰으며, 몸으로 정직하게 일해서 돈을 벌었다. 신용회복을 위해 절차를 알아본 뒤 오랜 시간 노력해서 구제됐다. 양육비는 주지 못했어도 모비를 통해 한부모 가정으로 국가 지원받는 방법이나 공공임대 주택에 들어가는 법을 나미에게 전달했다. 거절한 것은 모비 엄마였다. 다른 애들한테 놀림받는다나.
재혼한 부모가 죽은 뒤 배다른 자식끼리 유산 싸움하는 꼴 안 나도록 일찌감치 재혼도 포기했다. 자기 아버지처럼 무뚝뚝하지 않았고, 아들을 고집하거나 큰 딸만 예뻐하지도 않았다. 예쁜 옷이나 물건을 보면 색깔만 다르게 큰 딸과 작은 딸을 똑같이 사다 주었다. 진성은 자기가 아는 한 주변의 모든 아버지보다 다정했다. 그런 노력을 딸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아빠.... 엄마가 이번 수업료, 아빠한테 내달라고 하래."
기죽은 모비 목소리가 가여워 "걱정하지 마. 곧 보내줄게." 하고는 동생과 처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했다. 그래도 진성은 좋았다. 아빠 노릇을 하는 것 같아서. 자기의 비굴한 시간은 딸들만 모르면 아무렇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