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미는 아파트 단지 바로 앞에 옷가게를 차렸다. 애초에 자기와 나이가 비슷한 30대 여성을 대상으로 했으나 정작 손님은 대부분 50대 이상이었기 때문에 도매에서 떼어오는 옷 종류를 바꿔야 했다. 여성복 보세 가게는 흡사 복덕방과 비슷했다. 아주머니들이 아무 때고 들어와 믹스커피나 얼음물을 달라고 했고, 나미는 내주었다. 옷은 안 사면서 하루 종일 앉아 신세한탄을 하기도 했고, 동네 소문의 온상지이기도 했다. 이 옷, 저 옷 다 입어보고는 '다음에 올게.' 해도 나미는 손님이 있어 감사했다. 동네에 가게를 차린 덕에 모비와 동생이 하굣길마다 잠깐 들러 나미를 보고 갔기 때문이다.
나미는 말 옮기기 좋아하는 아줌마들의 특성을 잘 알아서 자신이 이혼했다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10년 단골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그건 나미의 자존심이었다. 말하지 않으면 누구나 나미를 사랑 듬뿍 받는, 새침하고 도도한 여자로 봤다. 나미는 정정하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큰 딸이 있었어? 이모인 줄 알겠네.'라는 소리에 잠깐 웃어줄 뿐이었다.
나미는 이 좁은 공간에 하루 종일 앉아 오가는 아줌마들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그러다가 운이 좋으면 옷을 몇 개 팔면서 번 돈으로 모비와 동생을 먹였다. 입 짧은 모비가 먹고 싶다는 것은 당장 대령했고, 질릴 때까지 사다 줬다. 정말이지 나미 자신이 먹는 것보다 오진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성의 누나가 연락도 없이 가게로 찾아왔다.
"어이, 일주일 안에 집 비우소."
"형님... 그게 무슨 소리세요?"
"나도 이혼을 해 가지고 그 집이 필요하니까 당장 비우라고."
"일주일 만에 어떻게 이사를 나가요?.... 그럼 그때 제가 드렸던 돈 돌려주세요."
"조진성이가 다 갖다 쓰고 없어. 300 남은 거 줄 테니까 일주일 안에 집 비워!"
3층 집을 급히 나올 때, 둘째 고모는 이 아파트 단지에 집이 두 채였다. 평수가 큰 곳에는 자기가 살았고, 작은 평수 아파트에는 세를 내어주고 있었는데 동생댁이 딱하니 전셋값만큼만 주면 바로 집을 비워주겠다고 했다. 나미는 선의라고 믿었다. 갈 곳이 없었다. 차용증도 없이 친정에까지 손을 빌려 모은 돈을 바로 주었다. 그렇게 살게 된 아파트였다.
그러더니 고모부가 바람을 피웠단다. 큰 평수의 아파트는 고모부가 갖고, 작은 평수는 고모 차지가 되었다. 자기도 갈 곳이 없으니 이제 나가라고 하는 것이다. 돈 300만 원으로 일주일 만에 두 딸과 자기가 살 집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진성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시장에서 모진 바람을 맞아봤던 나미는 이제 더 이상 당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자기 돈을 줄 때까지 못 나가겠다며 없는 배짱을 부렸고, 고소장이 오고 갔다. 모비와 동생은 어른들의 일을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고모가 현관문을 그렇게 세게 두드리기 전까지는.
쾅쾅쾅 쾅! 쾅쾅쾅 쾅!
"거기 있는 거 알아! 나와! 나오라고!! 빨리 집 비우라니까? 모비 엄마, 감옥 가고 싶어서 그래?"
나미가 시키는 대로 모비와 동생은 숨을 죽이고 집에 아무도 없는 척을 했다. 한낮에도, 한밤중에도 예고 없이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어쩔 때는 둘째 고모가, 다음엔 막내고모와 함께, 그다음엔 사촌오빠까지. 사납게 문을 두드리고 발로 차 댔다. 쾅! 쾅! 쾅쾅쾅 쾅! 쾅쾅쾅 쾅쾅! 두드리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모비의 심장도 빠르게 뛰었다. 신 벗으면 바로 거실인 구조라서 문 밖의 사람과 모비의 거리는 너무 가까웠다. 당장이라도 낡은 문이 뜯어질 것 같았다.
"니네 아빠한테 전화 좀 해 봐. 평소에는 잘만 하더니만."
"안 받아요..."
나미는 언제나 진성을 '니네 아빠'라고 불렀다. 전화 안 받는 건 진성인데 모비는 자기가 잘못한 것만 같다. 사촌오빠는 벌써 성인이라 자기 엄마 대신 나미 가게에 와서 욕지거리에 깽판도 놓는데 모비는 무릎 밑까지 오는 교복치마를 입은 중학생이었다.
드라마에서 이혼 가정의 딸을 연기하는 아역들은 "난 엄마, 아빠 둘 다 같이 살기 싫어! 왜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맘대로 이혼해?" 하고 잘만 대들던데, 모비는 볼멘소리 한 번 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미는 모비가
"아빠, 엄마한테 도대체 왜 그래? 계속 엄마한테 이러면 나 아빠랑 안 만날 거야!"라는 대사를 하길 원했다. '드라마에서는 자식들이 엄마, 아빠 사이에서 화해도 잘 시키던데, 너넨 뭐 했니?'라던 나미의 질책을 모비는 아주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