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미의 시간

모비는 알 수 없는

by 조모비

아무 연고가 없는 광주로 시집온 나미의 인간관계는 주로 모비 친구의 엄마들이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놓고 같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자녀와 남편 이야기를 소소하게 나누던 그 모임에서는 아무도 진짜 고민을 말하지 않았다. 은근한 자랑과 형식적인 축하만 있었다. 나미는 그런 모임이 피곤했지만 외로운 광주 생활에서 유일한 모임이었기 때문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모비가 초등학교를 졸업해도 자모 모임은 지속됐다. 주로 반장 엄마들로 이루어진 이 모임에서 나미는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고 그저 모비가 이번에도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만 했다.


그러나 이제 나미는 가장이었다. 위장 이혼이라더니 연락이 끊긴 남편이 이른 새벽 도둑 이사 나온 3층 건물에 다른 여자랑 살고 있다는 더러운 추문들 속에서도 나미는 사랑방, 교차로 같은 지역 신문의 구인구직 광고에 열심히 형광펜을 그었다. 짧은 유치원 교사 실습을 끝으로 제대로 사회생활도 해보지 못한 채 결혼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아니지, 그래도 그 덕에 우리 딸들을 만났지. 가슴이 터질 것 같을 때면 시외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소리 내어 울다가 마음을 독하게 고쳐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신문에 그은 형광펜 위로 엑스(X) 긋기를 반복한 끝에 나미는 민숙을 떠올렸다. 집안 살림만 하던 다른 학부형과는 달리 일하느라 바빠 모임에 자주 오지 못했던 민숙은 시장에서 꽤 큰 규모의 옷 가게를 하고 있었다. 민숙은 모임에 자주 출석하지 못했지만 민숙의 아들이 워낙 야무지고 똘똘하여 반장을 도맡아 했기 때문에 모임에서 뺄 수 없는 존재였다. 민숙과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이제 자존심은 무용했고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아야 했다. 나미는 민숙에게 전화를 걸어 커피 한 잔 같이 하자고 했다. 마주 앉은 나미는 다른 학부모들에게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자꾸 시선이 테이블 밑으로 갔다. 의미 없이 손가락을 매만지며 사정이 이렇게 되어서 일을 배워야 한다고. 점심만 먹여주면 옆에서 일을 배우면서 시키는 일 무엇이든 하겠다고... 도와 달라고 했다.


나미는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 9시쯤 돌아왔다. 시장 점포에는 벽이 없어 들이닥치는 바람을 곧장 맞았다. 휴게 시간이 따로 있지도 않았다. 민숙과 돌아가며 구석지에 앉아 물밥에 오이지를 먹었다. 옷에 먼지가 많아 손톱이 갈라졌고 목이 칼칼했다. 시장에서 여성을 상대로 옷을 파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욕지거리, 말도 안 되는 컴플레인, 좀도둑들까지. 시장은, 아니 세상은 험난한 전쟁터였다.


그렇게 집에 돌아가면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너무 추운 곳에 있던 탓이었다. 민숙이는 멀쩡한데 나미의 볼은 아직 적응하지 못했다. 모비가 자꾸 '엄마 술 마셨어?' 속 없는 소리를 한다. 이 녀석들. 오늘도 저녁을 먹지 않았나 보다. 싱크대가 비었다. '엄마, 배고파.' 안쓰러운 데 화가 난다. 밥통에서 밥 꺼내서 반찬만 꺼내 먹는 일이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밥을 안 먹냐고 화를 낸다. 동생 밥도 안 차려주고 뭐 했냐고 모비를 더 꾸짖는다. 나미는 자기가 시장에 적응하지 못한 것처럼 아이들도 엄마 없는 집을 적응하지 못한 것을 알았지만 슬픔을 분노로 바꿨다. 그러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았다. 피곤한 몸에, 안쓰러운 마음까지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런 날이 반복됐다. 엘리베이터 없는 아파트 4층을 걸어 올라가 철문을 열면 토끼 같은 자식들이 엄마- 하고 달려들었지만, 나미는 싱크대부터 얼른 확인했고 밥을 먹지 않은 날에는 불호령을 내렸다. 한 소리를 얻어듣고 훌쩍이며 늦은 저녁을 먹는 아이들이 밉고, 가여워서 클렌징크림이 눈에 들어간 듯 화장대 앞에서 소리 죽여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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