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또다시

by 조모비

니가 없는데도 해는 뜨고 또 지고

창 넘어 세상은 하나 변한 게 없어

삼켰었던 내 슬픔이 갑자기 터져왔어

내가 살고 싶던 삶이란 (아-) 이게 아닌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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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아 볼게 잊어도 볼게 널 위해서라면

허나 그래도 안되면 기다릴게

그때 또 다시

(임창정, 그때 또 다시)


모비는 백화점 육교 아래에서 산 최신 가요 테이프 중 임창정의 '그때 또 다시'를 무한 반복해서 들었다. 자기 방바닥에 누워 발라드를 반복해서 듣는 감수성을 갖추게 된 것이다. 하필이면 그때, 모비의 마음이 몽울지기 시작했을 때 끝없는 먹구름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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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나도 있고 예쁜 딸도 둘이나 있는데, 다시 일어서면 되지. 다시 시작해 보자. 응? 다시 잘해 보자. 모비 아빠."


잠이 깬 모비는 실랑이 소리를 따라 거실 미닫이문 밖으로 갔다. 술에 진탕 취한 진성이 계단이 주저앉아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모비도 얼른 맨발로 나가 진성의 다른 쪽 어깨를 부축하려고 애썼지만 나미와 모비에 비해 진성은 너무 크고 무거웠다. 부축할 때는 꿈쩍도 하지 않던 진성이 제 발로 일어서더니 현관 밖으로 나가버렸다. 모비는 두고두고 이 장면을 의문스럽게 여겼다. 왜 진성은 우릴 두고 나가버렸을까.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모비는 IMF, 부도, 압류, 위장이혼과 같은 단어를 알게 됐다. 그것보다 더 피부에 와닿는 사건은 전교어린이 회장 선거 사퇴였다. 선거 운동까지 마치고 투표용지에 조모비 이름이 다 찍혀 나온 마당에 모비는 기권을 했다. 나미는 미안하다고 했다. 엄마가 이제는 학교 행사에 참여하기가 어렵다며 사퇴를 권유했고 모비는 받아들였다. 선생님은 투표용지에 모비 이름이 있지만 거기에 도장을 찍으면 안 된다고 안내했다. 그래도 모비는 몰래 자기 이름에 도장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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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안 있어 모비는 전학을 갔다. 현관문을 열면 중문도 없이 거실이자 부엌이 이어지는 5층짜리 오래된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3층집의 분홍색 벽지, 붙박이장은 모두 두고 와야 했지만 나머지 가구는 버리지 못하고 이고 지고 온 지라 가뜩이나 좁은 집이 더 답답해 보였다. 그래서 어떤 방은 나미의 퀸 사이즈 침대 이외에는 어떤 물건도 들여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진성의 물건은 하나도 가져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집에 진성이 들어온 적은 한 번도 없게 됐다.


모비는 진성과 작별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그저 진성의 사업이 어려워져서 빚쟁이가 쫓아오니까 잠깐 떨어져 있는 거라는 설명을 나미로부터 들었다.


새 학교에서 몇 달 안 있다가 모르는 친구들과 졸업식을 했다. 모비는 이전 학교의 등나무가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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