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크 셔츠에 체크 넥타이를 하셨네요?”
“아, 이상한가요? 제가 가진 것들 중에 제일 좋은 것들로 고른 건데, 조합은 생각 못했네요. 하하.”
모비가 만난 그 남자는 말투와 표정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눈웃음과 눈주름이 교묘하게 겹쳐져, 웃으면 눈이 더 길어 보이는 사람. 손이 솥뚜껑만큼 두꺼운 사람. 화가 나면 콧구멍만 벌렁 일 뿐 소리 지르는 게 어색한 사람. 모비가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면 알퐁스 도데의 ‘별’ 한 구절을 읊어주고, 편지를 정현종의 시 ‘방문객’으로 시작하는 사람.
모비는 보호자가 필요하다고 했고, 남자는 평생 자기편이 필요하다고 했다. 모비는 신혼집이 전세여도 상관없다고 했고, 남자는 모비가 이혼가정에서 자랐어도 괜찮다고 했다.
모비는 5월의 신부가 되기로 했다. 26살이었다. 결혼식은 부모 슬하에서의 마지막 행사이니 최대한 양가 부모님 뜻에 맞추기로 했다. 시댁에서 골라준 금은방에서 결혼반지를 맞추고 시댁 친척집에서 한복을 대여했다. 나미가 골라준 혼수 그대로 가져왔다. 모비가 고른 건 드레스와 신혼여행지뿐.
식장에 진성의 손을 잡고 들어갔다. 나미와 진성이 혼주석에 나란히 앉았으나 둘의 무릎이 미세하게 서로 다른 바깥쪽을 향해 있었다. 모비는 식장에서 울지 않아서 철딱서니 없다는 소릴 들었다. 그저 사연 많은 여자로 보이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결혼식 덕분에 어색한 가족사진이 생겼다. 진성은 어느 컷에서도 웃지 않았다.
모비에게는 결혼식이 독립선언식이라고 생각했다. 나미와 진성 사이의 외줄에서 장대를 버리고 번지점프하는.
그러나 이는 모비의 대단한 착각이었다.
아이의 이름을 마음대로 짓지 못했고, 돌잔치의 유무도, 이사 방식도 마음대로 정할 수 없었다. 남자는 모비를 사랑했지만 자기 어머니도 사랑했기 때문이다. 시댁 어른이 권하는 보험이 우리 형편에 맞지 않아도 거절하지 못했고, 시부모님 대신 차 막히는 명절 전날, 남자가 친척들에게 명절 선물을 돌릴 때 모비는 혼자 집에서 어린아이를 돌봤다. 그래도 남자는 어머니를 기쁘게 하는 일을 선택했다.
명절날 시댁에 가면 남자의 어머니는 하루 종일 부엌에 계셨다. 그러면서도 악습을 대물리지 않겠다며 모비에게 일을 시키지 않았다. 남자는 그런 자기 어머니가 자랑스러웠다. 남자는 모비가 거실과 부엌 가운데에서 눈치 보며 앉아있는 고통을 알 수 없었다. 어른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면, 들고 있던 수저라도 내려놓고 고무장갑을 껴야 할 것 같은 모비의 압박감도 알지 못했다. 새벽 5시부터 차례상을 준비하는 시부모님의 기척에 불안한 마음으로 눈만 말똥거리는 모비 옆에서 남자는 마음 편히 잤다.
최 씨 조상 제사 모시는 날, 부엌에는 왜 최 씨 빼고 다 있는지, 명절은 왜 시댁부터 가야 하는지 모비는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아 괴로웠다. 교회에서 만난 모비 부부에게 차례상과 제사상은 참으로 무용했으나 그저 남자의 부모님을 위해 시간을 내고 봉투를 드린다는 것을 남자의 부모님도 알지 못했다.
남자의 아버지는 자기 아내와 며느리를 비교했다. 남자는 자기 어머니와 아내를 비교했다. 모비는 팔자 좋은, 분에 넘치는, 시대를 잘 타고난 젊은 여자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모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모비는 다른 시아버지들과 남자의 아버지를 비교하지 않았다. 그리고 누구의 기대에도 부응할 마음이 애초에 없었다. 그러나 남자만큼은 자기편이길 그리고 자기를 보호해 주길 바랐다.
시댁에서 성묘까지 따라가 점심을 먹고 다시 시댁에 들러 싸주신 음식을 챙겨 집으로 돌아오면, 명절 전부터 와있던 진성이 있었다. 친정아버지 가져다 드리라며 남자의 어머니가 조기와 홍어무침을 싸 주신다. 아버지 서운하지 않게 잘 모시라는 말씀이 남자의 어머니는 서운하다는 말로 들린다.
진성은 모비와 손주가 없는 빈 집에서 먹고 자며 조 씨 성묘를 다녀오고, 형수댁에서 차례를 지냈다. 결혼했단 이유로 모비는 더 이상 큰댁에 데려가지 않았다. 대신 동생을 큰집이나 성묘에 데려갔다. 동생은 나미를 도와 전을 부치다가 진성과 영화 한 편을 같이 봐 준다.
저녁이 되면 나미가 육전과 LA갈비를 들고 모비집으로 왔다. 나미는 그저 모비가 고생하는 게 싫어 진성의 저녁까지 준비했다. 진성은 나미가 차린 음식과 시댁의 홍어무침을 함께 먹었다. 나미와 동생이 돌아가고 진성은 모비 집에서 또 잤다. 진성은 다음날 아침 일찍 사우나에 다녀온 뒤 김치찌개를 끓여주거나 모비의 커피와 맥모닝을 사다 주었다. 그러다 진성까지 돌아가면 비로소 명절이 끝났다. 이런 명절이 또 10년간 흘러갔다.
모비는 남자에게 미안했다. 진성이 꽤 오랫동안 집에 머물기 때문이다. 남자는 착한 사람이었다. 모비의 아버지가 전혀 불편하지 않다고 했다. 모비는 진실일 리 없다고 생각한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면 모비는 견딜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자기 아버지여도 모비는 불편했다.
어른이 된 모비는 여전히 명절이 싫었다.
그러나 모두가 새로운 명절에 익숙해졌다. 연휴 시작 전에 진성과 저녁을 사 먹고, 다음 날 아침이면 짐을 챙겨 남자의 집을 가고, 하룻밤 잔 뒤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가고, 점심을 먹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진성과 지내고, 나미와 동생이 와서 함께 모비 집에서 저녁을 먹고, 그다음 날 아침 사우나에 다녀온 진성이 사 온 커피를 마시고.
누구도 고마워하지 않고, 미안해하지 않는 명절이 반복해서 지나갔다.
모비는 더 이상 남자의 집 부엌에서 기웃대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하거나 챙겨간 책을 읽었다. 저녁 식사 후 설거지가 모비의 몫이었다. 인력대기소처럼 소파에 앉아 시간을 죽였다. 그다음 날 아침에는 부엌에서 남자의 어머니가 건넨 음식을 거실의 아버지에게 배달하는 게 모비 몫이었다. 잉여 인력이었으나 그게 10년의 룰이었다.
그날 깨진 룰이 하나 있다면, 모비가 처음으로 남자의 집에서 자지 않았던 것이다. 추석인 데에도 날이 더웠다. 물론 핑계였다. 모비가 자기 집에서 잔 뒤 아침 7:30분까지 시댁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했다. 남자의 아버지가 정자에 앉아 있다가 차로 다가왔다. 모비가 인사를 드렸다. 남자의 아버지는 화가 나 있다. 모비를 바짝 쫓아와 퍼붓는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모비는 당황스럽다. 자신을 향한 비난의 목소리, 그리고 그 이상의 수치심.
"네가 시어머니 하고, 시어머니 보고 며느리하라고 그래라. 시어머니는 쎄빠지게 고생하고 며느리는 팔자 좋구나. 앞으로 차례고 뭐고 다 지내지 말자. 뭐? 어디 싸가지 없이 안 지내면 자기는 좋아? 너는 가족의 전통을 그렇게 무시하냐?"
남자의 아버지는 분명 아들이 아닌 며느리에게 분노를 퍼부었다. 훈계가 아닌 비아냥이었다. 분명 아주 오랫동안 응축된 에너지였다. 남자의 어머니를 부엌에서 돕지 않아서, 소파에 앉아서 핸드폰을 해서, 작은 어머니보다 늦게 와서, 때때로 안부전화를 하지 않아서, 선물을 하지 않아서? 음식을 하지 못해서?
남자는 아버지의 분노가 익숙했다. 그저 대상이 새로웠을 뿐. 남자는 착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제지하지도, 언짢은 내색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의 기분을 살피고, 비위를 맞췄다. 모비는 자기 말고 모두 다시 웃는 그 집에서 환멸을 느꼈다. 남자는 더 이상 모비의 보호자가 아니었다. 모비는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설에는 안정제를 먹고 남자의 집에 갔다. 똑같은 상황이 생기더라도 모비는 더 이상 남자의 보호를 기대하지 않았다. 안정제는 모비를 잠들게 했다. 소파가 아니라 침대에서 명절을 보냈다.
명절이 끝나면 제사가 있었다. 제사가 끝나면 시댁 쪽 결혼식이 있었다. 남자는 너덜너덜한 모비를 빠뜨리지 않고 잘 챙겨다녔다. 남자는 아주 착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