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가 남주인공에게 보호받는 여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를 보며 꿈꿀 때, 모비 동생은 여자 주인공이 아주 강한 캐릭터로 나오는 드라마를 좋아했다. 남자 도움 따위는 필요 없는 강한 여성이고 싶었다.
동생은 언니의 병을 가장 먼저 알았다. 모비가 우울증 진단을 받고 약을 먹기 시작했을 때, 동생은 자기의 가장 큰 우산이 찢어진 것 같았다. 내가 언니 등 뒤에 너무 숨어있었나? 자책했다. 그래서 언니가 슬프다고 할 때마다 동생은 울었다. 자기 때문인 것 같아서.
언니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이 광활한 우주에서 같은 슬픔을 가진 유일한 사람, 동생이 있어서 버텼다고 했다. 둘은 서로를 가장 아꼈다. 아주 자주 엄마보다 언니를, 동생을. 당연히 아빠보다 동생을, 언니를 사랑했다.
모비의 동생은 아빠의 새 집과 새 여자가 궁금했다. 호기심이라기보다는 불안감이었다. 아빠의 노후를 웬 나쁜 여자에게 다 뻇기는 것 아닌가 싶어서. 이런 동생을 모비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동생은 자기 눈으로 확인해야만 할 것 같았다.
진성은 반차를 쓰고 동생을 맞이했다. 제일 좋은 곳에 데려가 맛있는 것을 먹였다. 딸에게 자기 생활권을 소개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묘하게 들떠있는 아빠를 봤다. 며칠 전부터 뭘 사들고 가야 하나 고민했지만 동생은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밤에 따로 잘 숙소만 예약해 두었다. 진성은 펄쩍 뛰면서 아빠 집에서 자야지 무슨 소리냐며 동생을 데리고 갔다. 드디어 새 여자를 대면했다. 모비의 동생은 슬퍼졌다. 새 여자는 나미와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작은 키, 아담한 체구, 야리야리한 몸매, 서울 말씨. 진성은 모비 동생의 슬픔을 알 수 없었다. 새 아파트를 여기저기를 소개해 주었다. 모비의 동생은 더 슬퍼졌다. 새 여자의 옷장이 나미의 옷장과 너무 비슷했기 때문이다. 이 공간에 나미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새 여자는 선한 사람 같았다. 진성과 여자가 소파에 나란히 앉아 티비를 보며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 나누는 것을 바라보며 안도감과 알 수 없는 슬픔이 함께 밀려왔다. 새 여자가 세심하게 살펴준 빈 방의 이부자리 위해서 모비의 동생은 숨죽여 울었다. 예상했던 슬픔이었으나, 이 슬픔을 목도해야만 했던 자신을 원망하면서. 언니 대신 자기 혼자 온 것을 안심하면서.
어느 날 단톡방에 진성의 이상한 글이 올라왔다. 받아들이진 못하더라도, 이해는 해 줘야지. 서운하다는 내용이었다. 동생은 언니가 읽기 전에 얼른 진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더 이상 언니를 다치게 둘 수 없었다. 진성은 많이 취해있었다.
"너네가 그 어린것 앞에서 무슨 욕을 그렇게 해댔길래, 손녀가 할아버지한테 전화해서 할아버지 여자친구 싫단 얘기를 하는 거냐? 엉?"
"무슨 소리야, 아빠. 우리가 조카 앞에서 아빠 여자친구 욕을 왜 해. 한 번도 한 적 없어."
"거짓말하지 말아라. 그런데 어떻게 고 어린것이 그렇게 적대적으로 말할 수 있냐?"
"그럼 뭐, 할아버지 여자친구니까 명절에 가서 인사라도 올리라고 해야 해?"
"너넨 원래 아빠가 누구 만나는 거 싫어하지 않았냐? 아빠는 누구도 못 만나냐? 너네 때문에 호적에도 안 올리고 그냥 살림만 합쳐서 이제야 사는 건데. 픽업 한 번 해달라는 것도 그걸 안 해 주고."
"아빠는 언제 우리한테 허락 맡고 살림 합쳤어? 언니한테 그런 부탁을 하기 전에 만나는 사람이 있다, 같이 살게 됐다. 인사 한 번 시켜주고 싶다 이렇게 차근차근 설명을 했었어야지."
동생은 처음으로 용감해졌다. 언니를 위해서.
언니를 위해서.
가엾은 모비를 위해서.
더 가여운 것이 울면서 소리쳤다. 진성은 두 어린것의 슬픔을 알지 못했다.
동생에게 전해 들은 모비는 처음으로 진성을 버리고 싶었다. 못 전한 비밀도 포기하고 싶었다. 자기뿐 아니라 동생까지 상처 주는 진성이 미웠다. 대신 나서고 싶었지만 모비의 마음이 너무너무 얇아져서, 무딘 말 한마디로도 다 찢어질 것 같아서, 그럼 영영 이어 붙일 수 없을 것 같아서 모비는 나서지 못했다. 대신 처음으로 병에서 낫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동생이 안쓰러웠다. 심리 상담을 시작했다. 약을 꼬박꼬박 먹었다.